[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58. 나의 시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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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인천 구월동 길병원 착공식에서 필자(中)가 이헌기 당시 보사부 차관 등과 첫 삽을 뜨고 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지만, 나 역시 큰 병원을 운영하면서 아찔했던 순간을 수도 없이 겪었다. 1980년대 중반 지금의 인천 구월동 길병원을 건립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경기도 양평 취약지 병원을 인수한 뒤 정부로부터 500 병상 규모의 병원건립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착공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원활하게 지급되지 않을 때여서 건축능력과 함께 재정능력을 갖춘 업체를 찾아야 했다. 수소문 끝에 당시 도급순위 8위인 '공영토건'을 소개받았다. 지상 11층, 지하 2층을 짓기로 하고 총 공사비 58억 원에 계약했다.

그런데 이 회사가 터파기를 마치고, 지상 골조공사를 시작하려 할 때 당시 유명했던 '어음 사기사건'에 휘말려 부도가 났다. 결국 공사비 12억 원을 날리고, 다른 업체를 찾아야했다. 그때 다행히도 지인이 D건설업체를 소개했다. 회사 사장은 고맙게도 남은 돈, 46억 원으로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도 현장사무소와 크레인만 설치했을 뿐 도무지 공사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속셈이 있는 듯했다.

"왜 공사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건축비를 재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돈으로 건물을 짓기로 약속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공사를 안 할거면 나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법적으로 해결하자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소송을 통해 결론이 나려면, 적어도 2~3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으니 앞이 캄캄했다.

'내 꿈이 여기서 산산조각나는 것이 아닌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이 업체 사장을 설득해 줄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내가 후원회장으로 있던 한 단체장이 업체 사장과 잘 아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무작정 그분을 찾아갔다. 그리곤 염치를 무릅쓰고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했다. 며칠 뒤 이분 도움으로 건설업자는 떠났다. 이분은 병원 신축을 맡아 줄 S건설을 소개했고, 공사는 재개됐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한경호 병원 사무국장이 '위생난방'공사를 분리 발주했는데, 국가공인업체에서 실사를 나와 시공업체를 공사능력이 없는 업체라고 판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업체를 내보내고 공사를 남광토건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자 폭력배 40여 명이 각목을 들고 공사장에 난입해 인부들을 두들겨 패며 쫓아낸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곤 '그동안의 공사비 13억여 원을 달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실제 공사비는 2억 원이 조금 넘는다는 게 공인업체의 얘기였다.

나도 죽기살기로 못 주겠다고 버텼다. 폭력배들은 동인천에 있는 병원으로 몰려와 몇 날 며칠을 대기실과 계단서 소주병을 깨뜨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 사람들(폭력배)이 네 다리를 으깨버리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어. 집에 들어오지 마"라고 울먹거리는 것이다. 너무 무서워 며칠간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며칠 후 인천의 한 호텔에서 조직폭력배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우리 병원에 몰려왔던 폭력배들이 구속됐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러저런 일로 구월동 길병원의 완공은 2년 가까이 늦어지고 말았다. 가천길재단의 중심인 이 병원은 이런 진통 끝에 태어났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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