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57. 아낄 때와 쓸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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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직접 만든 옷(상의)을 입고 미주동창회에 참석한 필자(왼쪽 두 번째).

매니큐어로 스타킹을 때우고, 양말 구멍을 기워 신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웃는다. 며칠 전 구두를 벗다가 양말 기운 자국을 보고 나 자신이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다. 주위에서는 "몇백 억원의 시설투자를 결재하고, 몇억 원의 기부 출연을 선선히 하는 분이 왜 그리 짜십니까"하고 의아해 한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일 터이다. 내 어머니는 풍족한 살림살이에도 버선과 양말, 속옷까지 기워 입으셨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서울 용산의 산호아파트를 끼고 있는 동네미용실을 이용한다. 20여 년째 단골이다. 비용은 커트 8000원, 파마 2만 원이다. 간혹 지인들이 나를 따라와선 "크고 유명한 곳을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 왜 이곳을 이용하느냐"며 놀란다. 그럼 나는 "싸고 편안하니까"라고 대답한다.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끊어다 옷을 만들어 입는 것도 습관이자 취미였다. 내가 손수 만든 옷과 스카프가 공식모임에서 화제에 오른 일도 있다.

서울의대 동창회장으로 미주동창회에 참석할 때마다 난 동대문시장에서 몇 천원 주고 구입한 옷감으로 골프 웨어를 만들어 입었다. 원가가 만원도 안 들어간 옷을 보고, 다들 "어디 메이커냐?"고 물을 정도였다.

200개를 준비한 분홍색 스카프는 미주동창회 모임 마지막날 참석자 거의 전원이 매고 나와 '분홍색' 물결을 이뤘다. 그 모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도 그럴 듯 하다.

하지만 1998년 6월, MBC '성공시대'로 얼굴이 세상에 알려진 뒤부터 동대문시장에 발품 팔기가 어려워졌다. 방송이 나간 뒤 미주동창회에 입고 갈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끊으러 갔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포목상에 들를 때마다 "성공시대 나오셨죠" "길병원이죠. 방송 봤어요"라고 인사했다. 뒤에선 "이길여다!"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쑥스러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87년 개원한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의 조경비를 절약한 것도 얘기해야겠다. 건물을 완공한 뒤 조경업체에 나무식재 등 조경 비용을 물었더니 3억 원 정도 든다는 것이었다. 나와 언니는 이규일 당시 관리과장과 함께 서울 양재동과 구파발 화훼단지.수목단지를 찾아다니며 꽃과 나무를 골랐다. 수령과 모양이 같아도 가게에 따라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돈은 1500만 원 정도. 전문업체보다야 못했겠지만, 큰 돈을 아낀 셈 아닌가.

98년 강화도에 문을 연 가천의대 캠퍼스도 나와 언니가 조경을 직접 했다. 경험을 살려, 묘목 식재원 등을 다니며 나무를 골라 8억 원가량 견적이 나온 조경사업을 1억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끝냈다.

하지만 아끼다가 '사고'친 일도 있다. 난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외국에 나갈 때면, 비서없이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내 손으로 직접 들고 다녔다. 98년 미국에 있는 조카(최승헌 당시 가천의대 부총장)를 보기 위해 갔을 때, 공항에 도착해 큰 짐을 들어올리는 데 팔에서 돌연 전율할 만한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혼자서 무리하다, 팔의 인대가 파열된 것이다.

난 지금도 휴지 한 장, 이면지 한 장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돈은 '아낄 때'와 '쓸 때'가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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