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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략업소에 포위당한 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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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에서 주목받는 번화가의 하나로 손꼽히는 강남구 압구정동 H고교앞.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둔 오후 9시30분 학생들의 자율학습이 끝난 귀가시간이면 이곳은 어느새 「들뜬거리」로 변해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룸카페·생맥주집·레스토랑·다방·의상실·고급유흥업소의 간판을 밝히며 자그마치 1·5km나 뻗어 불야성을 이룬다.
이 큰길에서 불과 30m 떨어진 뒷골목은 사춘기의 고교생들을 어지럽게 유혹한다. 룸살롱·소극장·성인디스코장·술집·오락실·여관들이 줄지어 들어서 귀가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골목길 담벼락에 붙은 선정적 영화포스터나 룸살롱 간판밑에 「무경력 여종업원구함」 이란 광고쯤은 예사로운 환락가.
『카페나 레스토랑의 그윽한 분위기 한번쯤 맛보지 않은 학생은 「촌티나는 공부벌레」 죠.』 H고 3년 이모군 (18) 의 이한말은 학생들도 주변환경에 따라 일찌감치 고급소비문화에 젖어들고 있음을 비쳐준다.
『학교주변 환경이 큰 문제에요. 주변 2백m이내 정화구역에만도 유해업소가 44곳이나 됩니다. 게다가 인근 신사동까지 합치면 5백개가 넘어요.』
이학교 김모교사(30·여)는 『낮에는 패션거리, 밤엔 환락가로 날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학교주변환경 오염이 걱정』 이라고 했다.
향락문화의 구색을 골고루 갖춘 학생들의 등·하교길은 「젊음의 꿈」 을 키우는 대신 「멋진인생」 을 잘못 배우도록한 심각한 지경에 다다랐다.
고2 아들을 둔 홍모씨(45)는 5년전 강북에서 신사동으로 이사와 재작년 아들이 집가까운 H고에 배정받았을 때만해도 무척 흐뭇해 했다.
집에서 걸어다닐수 있고 신설고교인만큼 교사진이 의욕적일테고 비교적 여유있는 집안자녀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다보면 명문대진학도 바라볼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홍씨는 최근 아들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성급한 착각이었음을 알았을땐 이미 때가 늦었다. 1학년때 상위권의 성적이 2학년부터 뚝 떨어지더니 입시를 눈앞에 둔 지금은 다방등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까먹는 방황상태.
『나만 그런줄 아세요? 친구들중 학교앞 다방·카페에 안가본 애 없고 담배도 절반이상 피워요.』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출입에다 얼마전에는 술에 취해 동네카페의 기물까지 부순 탈선아들이 됐다.
『8학군 고교에 진학시키면 최소한 「자식농사」 만은 성공한 셈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다 독버섯처럼 늘어난 유흥환락가 탓입니다.』 어렵게 맹모의 삼천지교를 단행했던 오씨의 후회스런 하소연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옆 B중학교 앞은 이른바 「러브호텔골목」. 20여개의 장급여관이 들어선 이곳은 학생들의 통학길로 아침마다 여관을 나서는 어른들과 학생들의 어색하고 호기심에 찬 만남이 매일 이뤄진다.
『보충수업·잡무정리등을 마차고 오후 9시쯤 동료 남자선생님과 여관앞을 지나 귀가때 얼굴이 뜨거운 적이 많았어요.』
이학교 정모교사(26·여)는 『간혹 학생들과 마주칠땐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당혹스럽다』 고 했다.
학부형 김모씨(40)는 중3짜리 딸이 『물침대·회전침대가 뭐냐, 「러브호텔」 이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깜짝 놀라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고 나무라자 『학교앞 여관에 써붙여져 있다』 고 말해 한참 당황했다며 수심에 찼다.
여기에다 학교 후문쪽으로는 카바레·룸카페등 유흥업소가 40여개나 들어서 학부모들이 학교와 교육 구청에 수차례 진정을 했지만 허사로 끝났다.
88올림픽을 전후해 당국의 장려속에 다투어 문을 열다보니 학교주변환경 정화구역이 실종되고 말았다는 것이 구청관계자의 말이다.
지난5월 실시된 YMCA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내 중·고교주변 유해환경업소는 전체업소중 50·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학교가 유해업소에 둘러싸여 있음을 입증한다. 때문에 한두번 호기심에 끌려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심지어 최근 서울 K고교생 15명이 호화술집에까지 출입해 1백만원대의 술값을 뿌리며 탈선,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학교주변의 이같은 유흥업소 난립도 문제지만 공단이나 철도주변에 위치한 학교들은 매연·소음공해속에 수업을 빼앗겨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철길·4차선도로·철공소등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서울 영등포국민학교와 부산 사상공단안의 학장국교를 비롯한 9개국교와 귀포고교등 5개 중·고교가 대표적인 케이스.
사상공단안 14개 학교들은 1천9백여개 공해업체 한복판에 놓여 유독성 매연과 가스·분진등이 고스란히 교실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교사들은 『이때문에 학생들이 호흡기 질환과 두통증세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상수업까지 빼앗기고 있으나 당국은 실태조사마저 미루고 있다』고 했다.
특히 공장과 담하나 사이를 둔 학장국교의 경우 체육시간이면 애를 먹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조회도 못한다.
날로 더해가는 환경공해속의 학교들. 「학교주변환경 정화구역설정」 이 한갖 구호에 그친 현실은 학생들을 유흥가로 내몰고 향락문화가 교문앞까지 들이닥쳐 학생들의 건전한 가치관을 좀먹고 있는 세태다.

<안남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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