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격투기에 무너지는 민속씨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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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이 8일 기자회견에서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한 뒤 글러브를 끼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속씨름은 이제 프로와 아마가 함께 치른다. 8일 충북 제천에서 열린 제천장사 씨름대회 한라장사 결정전에서 김용대(현대삼호중공업)가 모제욱(마산씨름단)을 2-0으로 물리치고 통산 14번째 한라장사에 오른 뒤 환호하고 있다. [제천=뉴시스]

민속씨름의 '마지막 보루'도 무너졌다. 유일한 프로씨름단인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최근 은퇴를 선언한 '천하장사' 이태현(30)이 8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종합격투기 프라이드(프리 스타일) 진출을 공식 발표했다. '신세대 골리앗' 최홍만이 2004년 말 K-1(입식 타격기)으로 전향한 뒤 올 초 신창건설의 해체로 소속선수 3명이 또 K-1에 진출했다. 이제 이태현마저 프라이드로 떠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씨름이 일본이 만든 격투기에 완전히 흡수된 형국이다.

?뛸 대회가 없다=이태현은 기자회견에서 "뛸 대회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프로팀의 잇따른 해체로 프로 시스템은 붕괴됐다. 지난해에는 세 개 대회만 열렸고 천하장사 대회는 치르지도 못했다. 1983년에 시작된 민속씨름은 현재 아마와 프로가 통합으로 경기를 치르고 있다. 2004년까지 민속씨름은 '프로 대회'를 의미했다. 외환위기 전에는 프로팀이 8개에 이르렀다.

선수들은 연봉과 대회 상금을 통해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팀이 잇따라 해체되면서 선수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아마 선수와 싸워야 하는 프로 선수들은 '이기면 본전, 지면 망신'인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

?돈의 유혹=이태현의 올해 연봉은 8000만원이다. 선수들의 주요 수입원인 대회 상금은 크게 줄어들었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장사 씨름대회의 우승 상금은 1000만원이다. 지난해의 경우 세 개 대회 모두 우승해야 3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의 종합격투기는 목돈으로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다. 최홍만은 2년간 10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K-1에 진출했다. 이태현은 프라이드로부터 그 이상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속팀이었던 삼호는 "이태현이 계약을 위반했다"며 "계약금의 두 배인 8000만원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태현의 진로를 돌릴 만한 카드는 못된다. 최홍만이 격투기에서 성공한 것도 큰 자극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전도 없다=민속씨름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속속 격투기로 전환하고 있지만 한국씨름계는 속수무책이다. 민속씨름 초창기 천하장사 출신인 이만기 인제대 교수는 "씨름을 발전시켜야 할 한국씨름연맹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며 "선수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남기만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씨름연맹 측은 "지자체 팀이 22개로 늘어 대회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고 있다"며 "씨름 저변이 붕괴됐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실업(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대회 출전 기회가 보장되고 있다"며 반박했다.

강인식 기자

◆ K-1과 프라이드=K-1은 입식타격기다. 손과 발을 사용해 서서 대결하며 잡기와 꺾기 등 그라운드 기술은 허용되지 않는다. 프라이드는 그라운드 기술이 허용되는, 말 그대로 '종합' 격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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