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본지특약|「체코해빙」다시 오고 있다|억눌린 개혁욕구 머지않아 분출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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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체코의 현 지도부가 1990년 2월25일까지 권력을 지속하려 한다면 내년에 있을 제42회 체코 공산당 창당기념일에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을 초청하는 일은 재고해야할 것이다.
동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지켜본 우리로서는 수주일전 동독건국 4O주년 기념식에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참석한 것은 당시 호네커 동독국가원수로서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사태였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동·서베를린 시민들이 춤을 추고 부다페스트에서는 선거를 준비하고 바르냐바는 자유노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가운데 체코가 아직도 정치범들을 체포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고르바초프가 68년 소련탱크의 체코침공을 상쇄하기 위해 프라하에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정신적 토양을 제공했던 체코가 지금 철의 장막 뒤에 머물고 있는 사실, 21년 전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실행에 옮겨 잠시나마 이를 누렸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개혁을 비판하는 일은 아이로니컬하다.
68년 8월21일 소련군 탱크는 체코의 민주화요구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개고 프라하에 소련의 의도대로 순종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개혁파 지도자들은 가차없이 투옥됐다. 그들이 다시 석방됐을 때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고,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한 육체노동 뿐 이었다.
구스타프 후사크가 이끄는 친소정권이 행한 「정상화」라는 이름의 숙청작업으로 수십만 명의 개혁파 인사들은 체코사회의 각분야에서 축출돼 무명의 막노동꾼으로 전락했다.
새 지도부는 당시 비교적 순탄했던 체코경제에 힘입어 그들의 권력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마치 모든 문제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소련에 새로운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나타나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87년 4월 고르바초프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프라하시민들은 『고르비』『고르비』를 외
치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체코인들에게 소련식 방법이 더 이상 사회주의 체제의 유일한 길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는 또 진리에 관해 어떤 정당도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코지도부는 이 말을 극히 느린 속도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체코당국에 대한소련의 지지표시로 해석했다.
당시 체코지도부는 고르바츠프의 개혁노선에 대해 아직 확신을 갖기 못하고 있었다. 또 소련식 글라스노스트가 체코에는 맞지 않는다고 믿었다.
게다가 당시 고르바초프는 체코당국에 개혁을 행하도록 압력을 넣지 않았다. 그때 그는 다른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아무튼 그때는 그로써 끝났고, 체코는 다시 「안정」으로 돌아갔다.
소련군탱크의 지원 하에 탄생된 정권이 이러한 사실자체를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이제 다른 선택은 없다.
소련은 더 이상 브레즈네프독트린에 매달리지 않으며 폴란드와 헝가리는 68년에 있었던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침공에 가담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체코인들이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던 두브체크의 축출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헝가리인들이 임레 나지 전 총리를 복권시키는 것이 훨씬 용이한 일이다.
폴란드·헝가리·동독의 변화를 가져온 똑같은 「힘」이 지금 체코에도 부글부글 끓고있다.
단지 압제 때문에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가 알아듣게 얘기하기 전까지는 돌아가는 사정을 간파하지 못했다.
불가리아의 지프코프 역시 소련으로부터 모종의 신호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밀로스 야케스를 비롯한 체코지도층에도 보다 분명한 메시지가 필요할지 모른다.
체코국민들이 소련의 지도를 환영할 것은 확실하다.
체코국민들은 1990년에 또 다른 「프라하의 봄」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기 (조지타운 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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