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이념장벽 허문 「무혈혁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베를린 장벽 철거라는 동서독 관계의 급변이 한반도 정세와 남북한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10년이상 서독에서 분단국의 정치, 경제문제를 연구, 박사학위를 받은 서병철 교수(외교안보연구원, 동구 정치학)와 박광작 교수(성균관대, 경제학)의 대담을 통해 이 문제를 알아본다.
▲서병철 교수=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전면 개방한 조치는 우선 2차대전 후 동서양 진영을 분할한 얄타체제가 붕괴됐다는 세계사적 의미와 인간의 욕망이 체제와 이념을 뛰어 넘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광작 교수=그렇습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혁명적인 변화가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금세기 최대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 될 것입니다.
특히 공산주의가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는 계급 독재론이 소련을 비롯한 여러 동구국가에서 무너져 내리고 헝가리에 다당제가 도입되는 시점에서 이번 동독사태는 계급론의 설 땅이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이념사적 의미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서=이러한 상황을 맞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축적들이 있었겠지만 양 독간의 꾸준한 교류와 노력이 밑거름이 됐다고 봅니다. 냉전체제가 극에 달했던 다년 동서독은 베를린협정을 체결, 무관세교역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연간 1백20억 달러 규모의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작년 말까지 1천1백만 명에 달하는 인적왕래와 문화교류, 그리고 4차례에 걸친 정상회담 등 다방면의 교류와 경험축적이 있었습니다.
▲박=그런데 교류의 전제가 무엇이었느냐는 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선 양 독은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접근방식을 지양하는 대신 실질적 관계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에 노력했고 특히 정치·경제적 안정이라는 서로의 실리를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유엔 동시가입을 비롯해 서독이 동독을 고립시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먼저 포기한 것도 그렇고 동독정부가 서독을 통해 EC(유럽공동체) 내에 통합되는 길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와는 크게 다른 점이 아니겠습니까.
▲서=이번 사태로 독일 통일에 대한 성급한 전망이 나오고 있으나 통독전망은 먼저 동서독의 통일정책을 비교해 보는데서 유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독은 기본법에 민족자결에 의한 통일이외에는 일체의 통일방식을 인정치 않고 있으며 이 같은 원칙이 모든 정치활동의 기본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동독의 체제나 법률 등을 인정하는 특수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은 반드시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동독은 60년대 말까지 적화통일을 수장했다가 71년 호네커가 집권하면서 통일무용론을 제기했고 74년에는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강령에서 통일조항을 삭제한데 이어 헌법에서조차 통일조항을 제외시키고 말았습니다. 크롄츠 서기장도 호네커를 줄곧 지지해왔고 또 이번 동서독정상회담의제에서 통일문제는 제외시키는 것을 보더라도 동독의 통일무용론 정책은 변함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박=동서독의 통일문제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재정 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부각될 것으로 봅니다만 양 독 국민의 통일에 대한 자체 역량과 결집력이 새로운 국제질서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통일여부를 가능 하는 최대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서=그러나 국제정세로 미루어 볼 때 서독정부가 바라는 것처럼 민족자결에 의한 통일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이 된다면 EC 통합이라는 간접방법을 통해 동서독이 통일되거나 미소의 군축협상타결로 나토와 바르샤바기구가 무용화되든지 폴란드·헝가리에서처럼 비 공산당 정권의 수립으로 유럽이 탈 이념화하면서 한가족으로 뭉쳐질 때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박=동독 내부의 문제도 그리 간단치 않지요. 우선 자유총선거에 있어 반체제그룹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느냐도 분명치 않고 더욱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인가도 미지수 아닙니까. 따라서 베를린 장벽철거하나만으로 동서독의 통일 가능성을 점친다는 것은 시기상조인 듯 합니다.
독일통일문제는 단기적인 전술·전략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50년∼1백년을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에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봅니다.
▲서=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할 것은 주변 강대국 모두가 표면적으로는 동서독의 통일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는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모두 원치 않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동서독에 수십만의 병력을 주둔시키며 양 독의 보루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동서독이 통일되면 미·소는 병력주둔의 명분을 잃게되는 것 아닙니까.
또 영국과 프랑스도 실질적으로 유럽의 현 상태나 국경선을 변경시키고 국제정치 상황자체를 뒤흔드는 동서독의 통일에 동의할지 의문시됩니다.
▲박=이번 동독에서의 변화가 통일에 긍정적인 요인이 된다면 동독의 집권당 정조가 베를린장벽을 제거함으로써 동독내부에도 폴란드처럼 정치적·문화적 다원화가 도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점입니다. 일례로 크렌츠 서기장의 아들이 군축관계에 관한 대자보를 붙이다 적발돼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사실은 권력상층부에까지 새로운 자유물결이 이미 스며들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서=동독의 이번 사태는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봅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의 모범국가로 동독을 손꼽았고 북한의 체제를 옹호할 때 항상 동독을 예로 들어 왔거든요. 철석같이 믿었던 동독이 체제개편과 자유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박=공산권국가의 본질적인 문제는 경제적인 낙후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했고 바로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북한도 이를 회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서=그렇지요. 북한이 제아무리 보도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최근 일련의 혁명적 변화들이 흘러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볼 때는 북한사회를 오히려 경직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내다본다면 북한 역시 국민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서히 체제의 완화와 경직성을 탈피할 가능성이 있고 자유물결이 유입되면 자연적으로 체제 비판세력의 단결을 유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면 북한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와의 대화의 장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이번 동서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우리는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서독에서는 GNP의 20%이상을 사회보장비로 지출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2∼3%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휴전선이 무너졌다 하더라도 사회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현재 서독에서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통일·외교문제는 국내정치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북한뿐 아니라 우리정부도 국내정치의 과감한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서=한국과 서독이 체제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면 북한과 동독도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동독은 오래 전부터 서독으로의 이주를 허용해 왔고 체코를 통해 이주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해 특별열차를 제공할 정도로 자유나 여유가 있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로 이 같은 차이 때문에 동독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화와 파격적인 개혁조치를 단기적인 관점에서 북한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박=베를린장벽의 제거가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터져 나왔듯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도 모두 예측불허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예측치 못한 엉뚱한 상황이 벌어 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시기에 있어 김일성의 사후가 될지 아니면 그이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요. 재삼 재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독은 고도의 현대산업사회이면서도 사회복지국가를 이룩했기 때문에 세계사적인 사건이 발발할 수 있는 토양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북한의 변화를 반드시 유도하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자체의 내부적 수요와 역량, 그리고 주체적 적응능력을 갖춰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정치·사회·경제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리=문일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