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 회상기(34)-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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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때 나는 사실 이우적에게 실망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했다.
감옥 안에 오래도록 들어앉아 있으니 외부소식도 갈 들을 수 없고 하물며 일본의 중심 동경의 정세를 전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일본은 아직 강해 보이고 그렇게 간단히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이우적이 일시라도 전향하지 않으면 형기를 다 마쳐도 석방되지 않고 청주예방구금소에서 일평생 감금당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일시 수모를 당하더라도 풀려 나와서 건강을 회복해 다시 전투를 계속하려고 나왔겠지. 그리고 이제 갓 결혼해 몇 달되지 않았는데 곧 다시 항일전선에 들어오라 하니 잠시 주저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려했다.
일본은 병력이 부족하자 일본학생들뿐 아니라 병역의무도 없는 조선학생들까지 학병으로 끌고 갔다.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다니던 나의 종제 박진동도 학병에 끌려갔다.
1944년 겨울 대구에 있던 김찬기가 서울에 올라와 정봉식이 은신하고 외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나와 단둘이서 낙원동 중국음식점에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아버지 김창숙의 전언을 가지고 중경으로 김구 선생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나는 의심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1919년 무사히 상해로 탈출했다가 다시 국내에 잠입했다. 그리고 또다시 상해로 빠져나간 일이 있었다. 그는 유학자임에도 신출 기묘했다. 그렇기에 무슨 비밀루트를 알고 있는가 싶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찬성했다.
그런데 그는 『기왕 갈 바에는 아버지 개인 심부름뿐이 아니라 국내에 지하조직을 결성해 놓고 그 지하조직에서 파견 되어 가는 형식을 취하고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것은 대찬성이라고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김형하고 나하고 하태·정봉식·강대열·김형기·이우락 등 일곱 사람은 언제든지 곧 조직체를 구성할 수 있고 이우적은 아직 조금 더 정세를 관망하자고하나 결국은 우리조직에 참가할 것이니 여덟 사람의 지하조직은 틀림없으니 대표는 김형이 되던가 이우적을 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나는 제의했다. 그러자 그는 대표는 자기도 안되고 이우적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구가 아이들같이 여겨 믿지 않을 것이고 이우적은 유명한 공산주의자라 김구는 공산주의자를 싫어하니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더러 대표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안 된다. 나는 전혀 이름 없는 사람이라 김구가 알 턱이 없다. 그러면 여운형이 어떠냐? 국내지하조직 대표로 여운형을 내세우면 김구도 잘 알 터이니 대환영할 것 아닌가?』고 묻자 이번에는 김찬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박형이 몰라서 하는 말이오. 김구나 임시정부에서는 여운형을 전혀 신용하지 않소. 몽양이 참가한 임시정부회의 내용은 사흘도 안돼 일본정보기관에 새어나가 몽양을 일본스파이라고 불러다 사문조사까지 한일이 있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몽양은 일본정부사람들이 자기를 만나자한다고 그것을 큰 명예로 여겨 자랑하고 다닌다고 김구나 임시정부사람들은 몽양을 사람같이 여기지 않는다고들 해요.』 김찬기는 반대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이승만도 임정에서는 욕을 먹고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임시정부내의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르고 옛날과 같이 한 동지들이니 서로 동정하고 믿고있는 줄 알았다. 할 수 없이 나는 김찬기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지하조직의 이름은 「독립동지회」로 하기로 했다.
김은 중경뿐만 아니라 연안까지 들러 45년 말까지 돌아오기로 하고 나는 그 동안에 독립동지회를 정식으로 결성해 곧 전투태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놓기로 약속했다. 중경임시정부와 연안독립동맹과 우리 독립동지회가 국내외를 잇는 통일전선을 취할 계획이었다. 김찬기야말로 이 3개 독립단체를 연결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김창숙은 연안독립동맹의 지도자 김두봉이 상해에서 교포학교인 인성학교의 교장을 하고있을 때 한 방에서 거처한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김이 중경과 연안에 무사히 가기만 하면 일은 반드시 성사된다고 확신했다.
심산과 백범은 서로 마음을 줄 수 있는 가장 믿는 동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면 일본스파이로 의심할 수도 있지만 김찬기가 가면 김구나 김두봉이 다같이 믿을 것으로 여겼다.
김창숙과 이우적을 고문으로 하면 독립동지회는 국내에서 좌우가 합친 가장 순수하고 권위 있는 독립단체가 되리라 믿었다.
여기다가 해외 독립단체인 임정과 독립동맹의 좌우단체가 합작한다면 이것이 조선독립투쟁의 최고사령부가 된다고 생각했다. 김찬기야말로 그때 가장 귀중한 존재였다. 나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나는 그의 무사탈출을 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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