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고치는 것은 용서해도 가슴 키우는 건 못 참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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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가짜야?’

여자의 가슴이 육아의 도구에서 섹스 심볼이 된 이후 남자들의 관심이 이 부위에서 벗어난 적은 사실 별로 없었다. 하지만 최근처럼 여자 연예인의 가슴에 대한 ‘진위 논란’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은 전무했던 일이다.

아랍권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들 중 하나였던 한국에서 여성의 가슴이 대놓고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지난 80년대 이후. 유신시대의 청교도적인 도덕주의 치하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이런 관심들은 제5공화국의 등장 이후 부분적으로나마 숨통을 텄고. 세월이 흘러 인터넷 열풍과 함께 찾아온 ‘야동’ ‘야사’의 범람으로 급격한 개방을 맞았다.

‘이지혜 논란’과 ‘S자 곡선에 대한 찬미’가 화두가 된 21세기 이전의 한국 연예계에서 여자 연예인의 ‘가슴’에 대한 관심은 어떤 역정을 거쳤는지 간략하게 살펴봤다.

▲애마부인과 안소영의 시대

한국 연예계에서 ‘가슴’이 화두가 된 것은 지난 1982년 정인엽 감독의 영화 <애마부인>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실상 무명의 신인이었던 안소영은 이 영화를 통해 일약 ‘한국의 글래머 여배우 = 안소영’이라는 이름을 차지하게 됐고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차지하는 등 82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안소영이 지난해 발표한 누드 화보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만 봐도 ‘애마부인 안소영’이라는 이름이 당시 한국 사회에 얼마나 강렬하게 어필했는지 알 수 있다.

안소영을 필두로 2대 애마 오수비. 3대 애마 김부선(당시 데뷔명은 염해리)으로 이어지는 ‘애마 자매’들은 연이어 한국 영화사에서 간판 글래머의 역할을 했고. 역시 안소영이 테이프를 끊은 <산딸기> 시리즈도 <산딸기 2>에서 선우일란이라는 일세를 풍미한 글래머를 배출했다.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영화 <엠마누엘> 시리즈가 수입 금지되고 이보희 주연의 영화 <어우동>(85)이 지나친 노출 시비로 개봉 후 일부 장면이 삭제된 뒤에 다시 개봉되는 우여곡절을 겪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애마부인>류처럼 ‘대놓고 야한’ 영화를 표방했던 작품들은 상당한 모험이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아울러 안소영을 비롯해 여배우의 ‘가슴의 크기’가 영화 홍보의 포인트가 됐다는 것 역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젖소부인과 진도희의 시대

87년. 6.29 선언과 6공화국의 등장 이후 사회 전반에서 해금의 물결이 밀어닥친다. 나영희 주연의 88년작 <매춘>이 극장용 영화에서 일단 검열 해제의 혜택을 봤다면. 90년대 ‘가슴 담론’의 주 무대는 스크린이 아니라 16mm 성인용 비디오 시장이었다. 새로운 장르가 자리를 잡으면서 억눌려 있던 사회적 욕구가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이 시기 최고의 화제는 그 이름도 직설적인 <젖소부인> 시리즈의 진도희. ‘바스트 37인치’라는 묵직한 수치를 앞세운 진도희는 당대의 ‘섹스 심벌’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웬만한 스타 이상의 지명도를 누렸다.

진도희 이후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바스트 사이즈의 류미오와 ‘상류층 인사들의 검은 제의’ 폭로 등으로 기억되는 정세희 등이 인기 에로 스타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젖소부인>이라는 브랜드의 위력은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다.

‘1만장 판매면 대박’이라는 태생적인 시장의 한계를 안고 있던 에로 비디오 시장은 결국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공짜 야동(음란물을 가리키는 속어)’ 시대의 도래와 연예인 누드집의 만연이라는 양쪽의 직격탄을 맞고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 간다. 아무튼 90년대까지도 ‘가슴’에 대한 담론은 ‘얼마나 크냐’의 테두리를 넘지 못했다.

▲가슴 논란. 음지에서 양지로

90년대 말부터 이선정과 정양 등 글래머 연예인들의 방송 활동을 통해 가슴에 대한 관심은 사뭇 공공연해졌다. 지난 2003년 성현아 누드 이후로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연이어 누드집을 내놨고. 자연스럽게 영화 <미인>의 이지현이나 함소원 이혜영 등이 글래머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이들은 누드 공개 이후에도 한층 더 활발해진 활동으로 이전까지 만연했던 ‘누드는 한물 간 연예인들이나 찍는 것’이라는 풍조를 바꿔놓게 됐다. 이들과 함께 시대를 앞서갔던 김혜수를 필두로 이효리. 한채영. 송혜교 등 여자 연예인들의 ‘S자 몸매’를 찬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큰 가슴’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예쁜 가슴’을 만들기 위한 원더브라나 보형물 삽입 란제리들이 히트 상품으로 자리한 것도 이같은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가슴’이 오로지 크기만을 강조하는 섹스 심벌에서 여성미의 일부로 간주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매력적인 가슴. 진짜냐 가짜냐

21세기 중반을 넘어선 현재. 가슴의 지위가 매력의 상징으로 승격된 이후 ‘여자 연예인의 가슴’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화제는 ‘성형 여부’가 돼 버렸다.

‘큰 가슴’이 ‘명문대 졸업’처럼 자랑해야 할 강점이 되자 가슴 성형 역시 학력 위조만큼이나 부도덕한 행위가 돼 버린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커진 여자 연예인들은 군 입대를 앞두고 팔다리를 다친 남자 연예인 만큼이나 네티즌들의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됐다.

그 결과. 눈ㆍ코ㆍ입 등 얼굴 각 부위의 성형수술에 대한 시선은 “예뻐지려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쪽으로 상당히 부드러워졌지만 가슴 성형에 대한 시각은 오히려 예민해졌고. 얼굴 성형은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지만 가슴 성형 의혹을 받은 연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의혹을 해소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됐다.

‘원래 컸는데 발라드 가수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전에는 꼭 맞는 옷으로 일부러 커 보이지 않게 조였다’는 가수 별이나. ‘원래 컸는데 살이 좀 찌니 사람들이 가슴만 쳐다보는 것 같다’는 이지혜는 그 정점에 서 있다.

물론 이런 현상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매스컴이 침소봉대했다기보다는 해당 연예인들에게 있어 ‘가슴’이 홍보의 포인트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 어떻게 해서든 화제의 중심이 되기 위한 안간힘이 빚어낸 결과들이다.

이지혜는 원하는 대로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됐고. 이제 사람들은 ‘그 이지혜’의 노래가 대체 어떤 것인지 판단할 것이다.

송원섭 기자 <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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