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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라는 이름의 멀고도 낯선 나라를 여행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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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 여행① 백령도

백령도는 해무가 지배한다. 배가 들고 나는 것도 해무가 결정한다. 한낮인데도 해무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끝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용기포신항. 용기포 뒤로 보이는 모래밭이 사곶 해변이다.

백령도는 해무가 지배한다. 배가 들고 나는 것도 해무가 결정한다. 한낮인데도 해무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끝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용기포신항. 용기포 뒤로 보이는 모래밭이 사곶 해변이다.

백령도.
이 이국적인 섬을 어떻게 소개할까. 뱃길만 4시간 걸리는 낙도라고 하기엔 섬이 너무 크다. 백령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 큰 섬이다. 주민이 5000여 명이라는데, 섬에는 그만한 수의 군인도 산다. 섬에서 햄버거 가게와 카페가 자주 보이는 이유도 실은 군인 때문이란다.

섬은 본래 바다 위로 솟은 산인데, 이 섬에는 눈에 띄는 높은 산이 없다. 되레 엄청난 크기의 저수지가 있다. 서북쪽 해안엔 바위기둥들이 거대 석상처럼 우뚝 서 있고, 남쪽 해안엔 비행기도 내려앉는다는 해변이 펼쳐진다. 해무 자욱한 바다는 자못 신비로운데, 그 바다에서 물범이 고개를 내민다. 옛날 심청이 몸을 던진 바다도 이 섬 앞에 있다. 밥상은 더 경이롭다. 까나리액젓 뿌려 먹는 냉면이라니.

어느 먼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다. 낯선 풍광과 더 낯선 풍물을 보고 듣고 느끼며 새삼 여행의 본령을 생각했다. 백령도는 의외로 여행정보가 빈약했다. 때로는 불편했던 여행을 돌아보며 아직은 때가 덜 묻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정리해둬야겠다 싶어 백령도 매력을 여덟 가지로 추렸다. 이름하여 ‘백령팔경 유랑기’다. 촤르르르 촥, 콩돌 해변의 파도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1경 : 신의 마지막 작품

기암괴석 늘어선 두무진. 해안 절벽의 스케일이 시야를 장악한다. 해 질 무렵의 서해, 까나리 배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기암괴석 늘어선 두무진. 해안 절벽의 스케일이 시야를 장악한다. 해 질 무렵의 서해, 까나리 배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오랜만에 풍경에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메라 뷰파인더로 들여다보다 눈을 들어 새삼 육안으로 확인해야 믿기는 장면. 두무진이 펼쳐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두무진은 백령도를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승지다. 명승 8호로, 국가지질공원과 국가생태관광지역으로도 지정됐다. 장장 4㎞나 이어지는 해안 절벽을 바라보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떠올렸고, 10억 년 풍상을 버틴 기기묘묘한 바위 앞에서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며 감탄했던 옛 선비의 기록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무진은 스케일과 디테일 모두 국내 여느 해안 절벽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두무진의 바위기둥들.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로 회의를 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두무진이 되었다. 가운데 바위기둥은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 다닐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다.

두무진의 바위기둥들.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로 회의를 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두무진이 되었다. 가운데 바위기둥은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 다닐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다.

두무진 해안 절벽 사이로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저 계단을 넘어가면 서해가 펼쳐진다.

두무진 해안 절벽 사이로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저 계단을 넘어가면 서해가 펼쳐진다.

두무진(頭武鎭)이라는 이름이 어렵다. 원래는 두모진(頭毛鎭)이었다고 한다. 해안 절벽의 뾰족 바위에서 머리털을 연상했었나 보다. 바다에 솟은 바위기둥들에서 장군들의 머리(두무진)를 떠올린 건, 러일전쟁(1904) 이후로 알려진다. 일본군이 당시 이 천혜의 요새에 진지를 구축했었다고 한다. 머리털보다는 장군 머리가 더 어울려 보인다.

두무진을 여행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절벽 사이로 난 트레킹 코스를 걷거나. 두 방법 모두를 권한다. 전혀 다른 두무진이 나타난다. 두무진 포구에 횟집이 줄지어 있다.

2경 : 북녘을 바라보다

끝섬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영토 월내도. 직선거리로 7㎞ 떨어져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저 섬까지 들어와 백령도를 망원경으로 시찰했었다.

끝섬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영토 월내도. 직선거리로 7㎞ 떨어져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저 섬까지 들어와 백령도를 망원경으로 시찰했었다.

북위 37.52도. 백령도는 대한민국의 서해 최북단 영토다. 백령도와 인천의 거리가 228㎞고 황해남도 룡연군과 거리가 17㎞니, 남한 본토보다 북한 본토가 열세 배 이상 가깝다. 백령도에서는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적당한 긴장감과 호기심을 동반하는 북한 구경은 백령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백령도 북쪽 해안 어디에서도 북한이 보이지만, 몇몇 전망 포인트가 있다. 우선 끝섬 전망대. 전망대에서 북쪽을 내다보면 마라도처럼 평평한 섬이 보이는데, 이 섬이 월내도다. 2013년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목선 타고 들어와 백령도를 망원경으로 시찰했던 섬이다. 백령도와 월내도는 직선거리로 7㎞ 떨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반도가 황해남도 대동반도다. 대동반도 끝이 장산곶이다. 눈에 보이는 바다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려져 있다. NLL이다.

멀리 보이는 반도가 황해남도 대동반도다. 대동반도 끝이 장산곶이다. 눈에 보이는 바다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려져 있다. NLL이다.

두무진과 바다를 마주 보는 땅이 장산곶이다. 황석영 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한 번 비상하면 뭇 짐승이 벌벌 떤다는 장산곶매의 그 장산곶이다. 두무진과 장산곶 사이의 바다도 우리가 아는 바다다. 인당수. 그래, 맞다. 심청이가 빠졌다는 그 바다다. 두무진과 장산곶 사이에 NLL이 그려져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남북 모두 넘을 수 없는 선. 그 가상의 선이 그려진 바다에서 중국 어선이 꽃게를 잡고 있었다.

두무진 해안 절벽에 들어선 해안 진지. 해인 진지가 바라보는 방향에 북한 영토가 있다.

두무진 해안 절벽에 들어선 해안 진지. 해인 진지가 바라보는 방향에 북한 영토가 있다.

3경 : 황해 물범

백령도는 점방이물범의 집단 서식지다. 까나리 그물에 걸린 까나리를 잡아 먹고 있는 물범들을 포착했다.

백령도는 점방이물범의 집단 서식지다. 까나리 그물에 걸린 까나리를 잡아 먹고 있는 물범들을 포착했다.

우리 바다는 원래 사자와 호랑이가 지켜줬다. 동해에는 독도 바다사자(강치)가, 서해에는 백령도 점박이물범이 살았다. 이제 독도 강치는 보이지 않지만, 백령도 물범은 아직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백령도는 점박이물범 집단 서식지다. 봄부터 가을까지 백령도 곳곳에서 물범이 관찰된다. 인천녹색연합 박정운 황해물범시민사업단장에 따르면 백령도에는 현재 물범 300여 마리가 살고 있다. 물범 구경이 쉬운 건 아니다. 운이 좋으면, 두무진 앞바다에서 까나리 그물을 헤집는 물범을 볼 수 있다. 물범은 남북한과 중국이 보호 생물로 지정한 귀한 몸이지만, 백령도 어민에겐 영 성가신 존재다. 그물이니 통발이니 죄 망가뜨린단다.

하늬 해변의 물범바위. 날이 좋으면 멀리 보이는 바위에 물범들이 올라온다. 지금은 가마우지만 보인다.

하늬 해변의 물범바위. 날이 좋으면 멀리 보이는 바위에 물범들이 올라온다. 지금은 가마우지만 보인다.

하늬 해변. 현무암으로 돼 있는 바닥이 온통 굴로 덮혀 있다. 수평선에 물범 바위가 보인다.

하늬 해변. 현무암으로 돼 있는 바닥이 온통 굴로 덮혀 있다. 수평선에 물범 바위가 보인다.

물범 관찰 포인트는 하늬 해변에 있다. 하늬 해변 앞바다의 인공 암초가 물범바위다. 여기서도 물범을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선 물때가 맞아야 한다. 썰물 때 바위가 드러나야 물범이 올라온다. 해무가 짙거나 비가 내려도 안 나타난다. 백령도에 머문 사흘간, 하늬 해변에 두 번 나갔으나 물범을 보지 못했다. 대신 배 타고 나간 두무진 앞바다에서 여섯 마리를 만났다. 까나리 그물에서 놀고 있었다.

4경, 5경 : 돌과 모래

콩돌 해변. 콩돌 해변의 돌은 작고 예쁘다. 콩보다 더 작은 돌들도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어 돌을 갖고 나가면 안 된다. 적발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콩돌 해변. 콩돌 해변의 돌은 작고 예쁘다. 콩보다 더 작은 돌들도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어 돌을 갖고 나가면 안 된다. 적발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백령도에는 이름난 해변이 두 곳 있다. 사곶 해변과 콩돌 해변. 사곶 해변은 천연기념물 391호, 콩돌 해변은 392호다. 두 해변 모두 백령도 관광의 필수 코스다.

사곶 해변은 백령도 관광 책자 맨 앞에 등장하는 명소다.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다는 천연 비행장 해변. 단단한 규사토가 깔려 있어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한 해변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활주로로 활용했다고 한다. 한때는 여행사 단체관광 버스가 해변을 달리기도 했다. 지금은 비행기는커녕 차도 못 다닌다. 해변이 물러지고 있단다. 썰물 때 해변을 걸어봤는데, 꽤 흥미로웠다. 분명히 모래 해변인데, 포장도로처럼 딱딱했다.

사곶 해변. 한국전쟁 당시 이 모래 해변에 비행기가 착륙했었다. 지금은 바닥이 물러지고 있어 차량 통행도 금지했다. 썰물 때면 폭 300m의 해변이 펼쳐진다. 해변이 4㎞나 이어진다.

사곶 해변. 한국전쟁 당시 이 모래 해변에 비행기가 착륙했었다. 지금은 바닥이 물러지고 있어 차량 통행도 금지했다. 썰물 때면 폭 300m의 해변이 펼쳐진다. 해변이 4㎞나 이어진다.

콩돌 해변은 콩처럼 작은 돌이 깔린 해변이다. 콩보다 더 작은, 그러니까 잣만 한 돌도 많다. 알록달록 색깔도 다양하고 반들반들 윤이 나서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전국에 작고 동그란 돌로 이뤄진 해변이 여럿 있는데, 백령도 콩돌 해변의 돌이 가장 작고 예쁜 것 같다. 콩돌 해변에선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촤르르르 촥 촤르르르 촥. 파도가 밀려와 콩돌과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6경 : 성지 순례

백령도 성당에 모셔진 김대건 신부의 유해.

백령도 성당에 모셔진 김대건 신부의 유해.

백령도는 천주교 성지이자 기독교 성지다. 수많은 서양 문물이 서해를 건너왔듯이 종교도 이 바닷길로 우리 땅에 들어왔다. 백령도는 서양 종교가 이 땅에 첫발을 디딘 기착지 중 한 곳이다. 백령도를 방문하는 목적 중에는 성지 순례도 있다. 순례에 나선 천주교 신자는 여객선 요금을 할인받는다.

백령도 성당은 작은 성당이다. 이 작고 외진 성당에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백령도를 거점으로 한 해상 밀입국로를 개척했다. 김대건 신부의 활동으로 백령도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는 17명에 이른다. 훗날 이 인연이 인정돼 백령도의 작은 성당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실 수 있었다. 일부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백령도에서 체포된 것으로 나오지만, 백령도 성당 이성만 신부는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 인근 황해도의 순위도에서 체포됐으며 김대건 신부가 백령도에 상륙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옛 종탑. 중화동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다.

백령도 중화동 교회의 옛 종탑. 중화동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다.

백령도의 기독교 전통도 깊고 굳건하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세워진 장로교회가 백령도에 있다. 1898년 설립된 중화동 교회로, 옛 교회 옆 건물이 백령기독교역사관이다. 백령도에만 현재 교회가 12개 있다.

7경, 8경 : 냉면과 까나리

백령도 별미 사곶 냉면. 돼지 사골로 육수를 냈다. 냉면에 식초 대신 까나리액젓을 뿌려 먹는다.

백령도 별미 사곶 냉면. 돼지 사골로 육수를 냈다. 냉면에 식초 대신 까나리액젓을 뿌려 먹는다.

백령도는 남한에서 보면 끝섬이고 북한에서 보면 황해도 앞섬이다. 이 거리에서 비롯된 차이가, 남한 입장에서 매우 독특한 음식 문화를 낳았다. 백령도 밥상이 황해도 음식 문화를 거의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백령도의 황해도 음식은 전쟁 중에 내려온 피란민이 재현한 고향의 맛이 아니라 토박이가 대대로 지켜온 향토 음식이다.

사곶 냉면과 짠지떡에 황해도 음식 문화가 남아 있다. 돼지 사골로 낸 육수에 메밀이 많이 들어간 면을 쓰는 황해도식 냉면이 사곶 냉면이고, 찹쌀가루와 메밀가루로 반죽한 떡에 신김치를 넣어 찐 음식이 짠지떡이다. 두 음식 모두 백령도에서 처음 먹어봤다.

백령도 별미 게발. 소라 게의 발만 떼 매운 양념에 무쳤다. 먹는 게 성가시긴 하지만 밥도둑이다.

백령도 별미 게발. 소라 게의 발만 떼 매운 양념에 무쳤다. 먹는 게 성가시긴 하지만 밥도둑이다.

소라의 종류인 '삐뚜리'. 소라와 똑같아 보이는데 내장 부분은 꼭 떼어내 뒤 먹어야 한다. 내장에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멍해진단다.

소라의 종류인 '삐뚜리'. 소라와 똑같아 보이는데 내장 부분은 꼭 떼어내 뒤 먹어야 한다. 내장에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멍해진단다.

백령도 밥상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게 까나리다. 양미리 새끼가 까나리다. 백령도에선 까나리로 만든 액젓으로 모든 음식의 간을 한다. 냉면에도 식초 대신에 까나리액젓을 넣는다. 멸치처럼 볶아서도 먹는다. 까나리가 멸치보다 가늘다. 소라 게의 발만 떼어내 매운 양념에 무친 ‘게발’, 고동의 종류 ‘삐뚜리’도 백령도에서 처음 맛본 별미다. 무엇보다 백령도 생선회는 다 자연산이다. 육지에서 양식산을 들여오기엔 뱃길이 너무 멀어서다. 백령도 바다는 손꼽히는 우럭 산지다.

백령도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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