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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초 대신 까나리액젓 뿌린다, 냉면 지식 무참히 깬 사곶냉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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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별미 사곶냉면. 돼지 사골로 육수를 냈다. 식초나 겨자 대신 까나리액젓을 넣어 먹는다.

백령도 별미 사곶냉면. 돼지 사골로 육수를 냈다. 식초나 겨자 대신 까나리액젓을 넣어 먹는다.

냉면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만 있는 줄 알았다. 굳이 넣자면 진주냉면도 있겠으나 이른바 ‘면스플레인’ 서슴지 않는 ‘냉면성애자’들의 세상에서 냉면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물냉면으로 대표되는 평양냉면이거나 비빔냉면으로 상징되는 함흥냉면.

실은 하나가 더 있다. 황해도 냉면. 평양냉면·함흥냉면처럼 이북 음식인데, 백령도의 황해도 냉면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사곶냉면’이라 불리는 백령도 냉면은, 피란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재현한 음식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향토 음식이다. 지금은 백령도가 인천시 옹진군 소속이지만, 원래는 황해도 땅이었으니 되레 당연한 내력이다.

말로만 듣던 사곶냉면을 처음 먹어보고 여러 번 놀랐다. 냉면치고는 별난 재료와 조리법에 놀랐고, 기대보다 맛있어서 또 한 번 놀랐다. 여태 쌓은 냉면 지식이 백령도에서 무참히 깨쳤다.

까나리액젓이 완성하는 맛 

백령도 사곶냉면에서 면을 뽑는 장면. 메밀이 70% 이상 들어간다.

백령도 사곶냉면에서 면을 뽑는 장면. 메밀이 70% 이상 들어간다.

지난 11일 백령도 사곶리의 ‘사곶냉면’. 백령도에서 전통 방식으로 황해도 냉면을 낸다는 여섯 집 중에서 원조로 통하는 곳이다. 백령도 토박이 김옥순(69) 할머니가 40년 넘게 냉면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면은 어떻게 쓰세요? 면 뽑는 거 보니 메밀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네요.
메밀이 거의 다예요. 밀가루는 20%나 될까. 메밀은 백령도에서 나는 거예요.
육수는 뭘 쓰세요?
돼지 등뼈. 꼬박 5시간 고와요. 고기는 안 넣고 사골만. 평생 돼지 뼈만 썼어요.

돼지 등뼈로만 육수를 낸 냉면이라. 처음 들어봤다. 사곶냉면 집 중에서 몇몇은 소고기로 육수를 낸다는데, 김옥순 할머니는 분명히 “평생 돼지 뼈만 썼다”고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어쩌다 이북 음식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을 때다.

“이북 음식? 우리 동네 음식이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배운 대로 하는 거야.”

백령도 주민은 5000명이 조금 넘는다. 그중에서 1000명 정도가 바다 건너 황해도 출신인데, 주로 사곶리에 모여 산다. 백령도 주민 김응균(59)씨는 “전쟁 통에 황해도 냉면이 넘어온 게 아니라 황해도 본토 사람이 사곶에 많이 살아서 황해도 냉면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백령도의 황해도 냉면을 사곶냉면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사곶냉면의 비빔냉면. 소스에서 고추장 맛이 강하게 났다.

사곶냉면의 비빔냉면. 소스에서 고추장 맛이 강하게 났다.

사곶냉면의 반냉면. 비빔냉면에 물냉면 육수를 부었다.

사곶냉면의 반냉면. 비빔냉면에 물냉면 육수를 부었다.

사곶냉면은 모두 세 가지였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그리고 물냉면 육수와 비빔냉면 소스가 함께 들어간 반냉면. 돼지 사골만 들어간 물냉면 육수는 제주도의 고기국수 국물처럼 단맛이 돌았다. 마늘과 생강을 넉넉히 넣어 잡내를 잡았다. 면은 당면처럼 얇았는데, 겉껍질까지 빻아서 메밀 특유의 거친 맛이 느껴졌다. 탄력은 적당했다. 씹어 삼키기에 좋았다.

식당 직원이 냉면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냉엔 까나리액젓, 비냉엔 들기름을 넣고 드세요”라고 말했다. 식초도 겨자도 아니고 까나리액젓이라니. 정말로 식탁엔 맑게 희석한 까나리액젓 통이 있었다. 네댓 방울 넣고 국물을 떠먹으니 깔끔한 맛이 났다. 식초와 겨자도 넣고 먹어봤는데, 까나리액젓만 넣은 게 제일 나았다. 비빔냉면과 반냉면은 고추장의 텁텁한 맛이 강해서 입에 안 맞았다. 물냉면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제주 고기국수보다 고급스런 맛이랄까. 마지막에 첨가한 까나리액젓의 힘인 듯싶었다.

짠지떡을 아시나요

백령도 대표 별미 짠지떡. 김치만두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떡이다.

백령도 대표 별미 짠지떡. 김치만두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떡이다.

백령도의 또 다른 황해도 음식이 ‘짠지떡’이다. 이름은 떡이지만, 생긴 건 영락없는 김치만두다. 얇은 피 안에 흔히 ‘짠지’라 부르는 신김치가 들어 있다. 짠지떡도 사곶리에서 먹어봤다. 사곶1번지칼국수. 한종심(60)씨가 25년째 메밀칼국수와 짠지떡을 하는 집이다. 한씨는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음식이라고 했다.

만두네. 근데 왜 떡이라고 해요?
떡이야. 찹쌀이 들어가잖아. 쌀이 들어가니까 떡이지.
찹쌀가루요? 메밀이 아니고요?
찹쌀가루가 제일 많이 들어가고, 다음에 메밀가루. 반죽할 땐 밀가루를 조금 넣고.
메뉴판엔 왜 짠지떡이 없어요? 
손이 많이 가서 잘 안 해. 지금 백령도에서 우리 집 말고 짠지떡 하는 데가 한두 집 더 있을까? 우리 집도 전날 예약해야 먹을 수 있어요. 
짠지떡. 들기름을 뿌려서 나온다. 한 개에 1000원이다.

짠지떡. 들기름을 뿌려서 나온다. 한 개에 1000원이다.

한 입 베어 먹었다. 생긴 건 대구 납작만두 같았으나 맛은 강원도 내륙지역의 메밀전병에 가까웠다. 잘게 썬 김장김치에 갯벌에서 캐온 굴 넣고 들기름 뿌려 소를 빚는다고 했다. 짠지떡은 7∼8분 정도만 찐다. 푹 익히지 않아서 김치 소의 아삭아삭한 식감이 도드라졌다.

메밀칼국수와 갯굴. 손톱만 한 작은 갯굴을 넣어 육수를 낸다.

메밀칼국수와 갯굴. 손톱만 한 작은 갯굴을 넣어 육수를 낸다.

함께 먹은 칼국수도 기억에 남았다. 7대 3 비율의 메밀과 밀가루 면에 갯굴로 육수를 낸 칼국수였다. 들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심심하면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맞추라고 했다. 뜨거운 메밀국수를 먹어본 적이 있었나? 손톱만 한 갯굴이 밋밋한 맛을 잡아줬다.

백령도는 인천에서 228㎞ 떨어져 있다. 북한(황해도 장연군)과는 17㎞ 거리다. 백령도는 물리적 거리처럼 정서적 거리도 북한과 더 가깝다. 별미를 맛봤다고만 하기엔, 음식에 밴 사연이 너무 깊었다.

백령도=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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