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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이모, 물회요"라니…'낙원의 밤' 치명적 옥에 티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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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의 픽 - 물회 탐구생활

영화 '낙원의 밤'의 장면. 제주도 배경으로 끔찍한 폭력이 벌어지는 영화에서 의외로 물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 영화 장면 캡처.

영화 '낙원의 밤'의 장면. 제주도 배경으로 끔찍한 폭력이 벌어지는 영화에서 의외로 물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 영화 장면 캡처.

넷플릭스 영화에 ‘낙원의 밤’이 있습니다. ‘신세계’ 박훈정 감독 작품이어서 일부러 찾아봤지요. 소감이라면, 음… 물회가 인상에 남더군요. 제주도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선혈 낭자한 폭력이 이어지는데, 제주 물회가 제일 먼저 떠오르다니요. 저만 그런가 싶어 인터넷 게시판을 찾아봤더니, 어럽쇼? 다들 물회 타령이었습니다. “물회 먹고 싶다” “그 물회집 어디냐” 등등… 영화에 나온 식당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 네티즌도 허다하더군요.

실제로 영화에서 물회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남녀 주인공 태구(엄태구)와 재연(전여빈)의 소울푸드이자, 두 주인공의 정서를 잇는 매개로 등장하지요. 하나 물회라면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여행기자에게, 영화 속 물회는 허점투성이였습니다. 어떤 장면이 옥의 티였고, 나아가 진짜 제주 물회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물회만큼 지역색 뚜렷한 음식도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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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잘 먹을게요.”

식당에서 물회가 나오자 재연이 하는 대사입니다. 재연은 제주 토박이는 아니지만 “아직 육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식당을 안내할 만큼 제주 생활이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모라니요. 삼촌이라고 했어야지요. 제주에선 남녀 구분 없이 연장자면 모두 삼촌이라고 부르지요. 제주 4·3을 다룬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을 읽어보셨는지요. 여행기자를 하기 전에는 저도 순이가 왜 삼촌인지 의아했었습니다. 제주에는 이모 고모는 없어도 삼촌은 많습니다.

이 집 물회

제주도 제주시에 먹은 한치물회. 한치물회는 제주 관광객을 겨냥해 개발한 음식이다. 손민호 기자

제주도 제주시에 먹은 한치물회. 한치물회는 제주 관광객을 겨냥해 개발한 음식이다. 손민호 기자

“물회 먹을 줄 알죠? 이 집 물회가 죽이거든. 난 다 괜찮은데 죽으면 이 집 물회 못 먹는 게 제일 아쉬워.”

다시 재연의 대사를 인용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재연이 이 집 물회 맛을 제 목숨에 빗대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제주도에서 물회 드셔보셨지요? 메뉴판에 ‘물회’가 있던가요? 물회는 개별 음식이 아닙니다. 찌개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가 있듯이 물회는 자리물회, 한치물회, 전복물회, 소라물회 등이 있습니다. 경북 해안에는 꽁치물회도 있고요, 경주에선 한우물회도 팝니다. 디테일이 살려면 재연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난 자리물회, 넌?”

영화 속 물회의 정체

영화 '낙원의 밤'에 나온 물회. 뿔소라와 빨간 국물이 보인다. 제주 전통 물회가 아니다. 사진 영화 장면 캡처.

영화 '낙원의 밤'에 나온 물회. 뿔소라와 빨간 국물이 보인다. 제주 전통 물회가 아니다. 사진 영화 장면 캡처.

영화에 나온 물회는 소라물회로 보입니다. 고명처럼 물회에 얹는 해물이 뿔소라를 썰어 놓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맞을 겁니다. 영화는 주로 제주도 동북쪽 해안에서 촬영했습니다. 구좌읍 동복리의 여러 장소가 등장하지요. 이 동네도 해녀가 많습니다. 뿔소라는 우도를 비롯한 제주 동쪽 바다의 주 특산품입니다. 이쪽 동네에서 소라물회를 많이 팔지요. 참고로 영화에 나온 식당은 물회집이 아닙니다. 영화 덕분에 떠서 새로 물회를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국물이 빨갛습니다. 고추장을 풀었습니다. 제주 전통 물회가 아닙니다. 관광객용 메뉴입니다. 사실 소라물회 자체가 최근에 개발된 음식입니다. 제주 전통 물회는 누렇습니다. 제주에선 간을 맞출 때 된장을 풉니다. 제주 사람인 양 행동하는 재연이 관광객 음식을 앞에 놓고 “육지 사람은 잘 모르는” 물회집이라고 말합니다. 디테일이 엉성합니다. 감독이 물회를 안 좋아하나, 잠깐 의심했었습니다.

초장 설탕에 뿌려서  

울릉도에서 먹은 꽁치물회. 전통적인 경북 방식의 물회다. 고추장에 생선, 그리고 채소만 들어있다. 물은 각자 알아서 넣어 먹는다. 손민호 기자

울릉도에서 먹은 꽁치물회. 전통적인 경북 방식의 물회다. 고추장에 생선, 그리고 채소만 들어있다. 물은 각자 알아서 넣어 먹는다. 손민호 기자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이 바닷가여 가지고 엄마가 공판장에 직접 나가서 남은 해산물 주워다가 초장에 설탕 쫙 뿌려서 항상 만들어주곤 했거든.”

태구의 대사입니다. 초장에 설탕 뿌린 물회라. 동해안 항구 마을 관광 식당의 물회입니다. 동해안, 특히 경북 해안 지역의 전통 물회에는 되직한 고추장이 들어갑니다. 내다팔지 못하는 잡어를 대충 썰어 고추장 넣고 쓱쓱 비벼 먹었던 게 이쪽 동네 물회의 시작입니다.

경북 물회에는 물이 없습니다. 회무침처럼 채소와 잡어회, 고추장을 넣고 비빈 뒤 나중에 물을 붓습니다. 맛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경북 물회를 세 번에 나눠 먹습니다. 3분의 1은 회무침으로 먹고, 다른 3분의 1은 밥을 넣고 비벼 회덮밥으로 먹고, 나머지 3분의 1은 물을 부어 물회로 먹습니다. 태구가 제주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한데, 어느 바닷가에서 자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식탁의 초장통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항에서 먹은 자리물회. 보목항은 제주에서도 자리돔이 많이 나는 포구다. 손민호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항에서 먹은 자리물회. 보목항은 제주에서도 자리돔이 많이 나는 포구다. 손민호 기자

영화를 보면 식탁에 놓인 빨간 초장통이 보입니다. 제주 전통 물회집이면, 그 자리에 사과식초 병이나 빙초산 병이 있어야 합니다.

애초의 제주 물회는 자리물회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자리돔으로 만든 물회를 이르지요. 제주 사람은 자리물회를 먹을 때 빙초산 한두 방울을 꼭 떨어뜨립니다. 아시다시피 빙초산은 음식이 아닙니다. 화학약품이지요. 그러나 제주 사람은 빙초산이 들어가야 물회 맛이 산다고 믿습니다. 저도 한 번 도전해봤다가 독한 냄새에 기절할 뻔했습니다. 대신 사과식초를 듬뿍 넣습니다. 식초 특유의 정신 번쩍 드는 향이 된장 누린내를 잡아줍니다. 빙초산(또는 식초)이 뼈째 썬 자리돔을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도 한답니다.

자리물회

자리돔. 제주를 대표하는 서민 생선이다. 지금이 제철로,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가 다 자란 것이다. 제주 전통 물회는 자리물회 한 가지였다. 손민호 기자

자리돔. 제주를 대표하는 서민 생선이다. 지금이 제철로,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가 다 자란 것이다. 제주 전통 물회는 자리물회 한 가지였다. 손민호 기자

제주에선 자리돔을 ‘자리’라 줄여 부릅니다. 자리돔물회가 아니라 자리물회인 까닭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이 자리 철이네요. 옮겨 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자리돔입니다. 서귀포 보목 앞바다와 대정 모슬포 앞바다가 자리돔의 이름난 자리입니다. 보목항에 전통 방식으로 자리물회 하는 집이 모여 있습니다.

옥돔이 제주를 대표하는 고급 생선이라면, 자리돔은 가장 서민적인 생선입니다. 크지도 않습니다. 어른 손바닥만 합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다지만, 옛날엔 정말 흔했답니다. 하여 조리법도 다양합니다.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젓갈도 담가 먹습니다. 육지로 시집온 제주 여자가 입덧할 때 제일 많이 찾는 음식이 자리젓이랍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도 그랬답니다.

서귀포시에서 먹은 제주 전통 방식의 자리물회. 된장만 풀어 국물이 누렇고 자리돔은 뼈째 썰었다. 자리돔 위에 얹은 풀이 제피다. 손민호 기자

서귀포시에서 먹은 제주 전통 방식의 자리물회. 된장만 풀어 국물이 누렇고 자리돔은 뼈째 썰었다. 자리돔 위에 얹은 풀이 제피다. 손민호 기자

된장 풀어 누런 국물의 자리물회가 제주의 전통 물회입니다. 여기에 빙초산은 아니어도 식초를 뿌립니다. 그리고 한 단계가 더 남았습니다. 제피. 고수처럼 향이 강한 풀입니다. 제피까지 넣어야 비로소 자리물회가 완성됩니다. 호불호가 강해 제주에서도 안 주는 집이 많습니다. 제피를 안 주면 당당히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럼 주방에서 삼촌(남자가 아닙니다)이 고개를 삐쭉 내밀고 물어봅니다. “제주꽝?”

영화에서 재연이 “이모! 물회!”라고 했는데도 국물 누런 자리물회가 나왔다면, 그리고 재연이 아무렇지 않게 빙초산(아니면 식초라도) 뿌리고 제피까지 넣었다면 제 영화 별점은 달라졌을 겁니다. 그래도 ‘한라산’ 홀짝이는 장면은 좋았습니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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