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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원 소송비 대주고 사라진다…법정 메운 그들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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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법정 안은 전부 다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그저 소식을 듣고 와서 법정을 메워주셨어요. 정말 떨렸는데 덕분에 당당하게 진술할 수 있었습니다.”

6년 전 한 문인에게 시를 배우다 성희롱을 당한 김모씨(23)의 회상이다. 지난해 4월 열렸던 첫 재판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김씨는 사건 발생 1년 후인 2016년 문단 내 성희롱을 처음으로 알리며 미투(ME TOOㆍ성폭력 고발 운동)를 시작했다. 그러나, 폭로 3년 뒤 가해자 A씨가 김씨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김씨는 ‘성희롱은 사실이고 오히려 명예훼손은 내가 당한 것’이라는 취지로 맞소송을 했다.

8번의 재판 방청석 채운 ‘여성 연대자들’

이후 1년간 법정에 8번 섰다. 그때마다 30석 남짓 되는 방청석을 채워주는 건 익명의 ‘여성 연대자들’이었다. 김씨는 “솔직히 말해서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도 잘 모르는 분들이다. 재판이 서울에서 열리는 것도 아닌데 서울, 부산 등 각 지역에서 와줬다”며 “홀연히 왔다가 사라지시는 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첫 재판날인 지난해 4월 찍은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사진. 김씨는 "재판 시작하기 한 30분도 안 남았을때 찍었던 사진"이라며 "혼자 와서 떨렸는데 사진 찍고 난 뒤에 연대자분들을 만나서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까 든든했다"고 설명했다. 김씨 제공

김씨가 첫 재판날인 지난해 4월 찍은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사진. 김씨는 "재판 시작하기 한 30분도 안 남았을때 찍었던 사진"이라며 "혼자 와서 떨렸는데 사진 찍고 난 뒤에 연대자분들을 만나서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까 든든했다"고 설명했다. 김씨 제공

재판이 끝나면 김씨를 KTX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김씨는 “재판장을 벗어나 제가 가해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혹시 모를 위험성을 생각해 저를 둘러싸서 보호해주고 역까지 바래다줬다”고 회고했다. “와줘서 고맙다. 이 은혜 꼭 갚겠다”고 말하는 김씨에게 한 여성은 “저한테 갚을 생각 말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그분들을 도와달라. 그게 갚는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5월, 재판부는 김씨에게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또 김씨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A씨는 1100만원을 배상하라”고 김씨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카카오톡을 통해 A씨와 김씨가 나눈 대화 내용 중 “우리 OO이 나랑 약속하나 할래? 어떻게 해도 나 안 버린다고. 내가 성폭행해도 안 버린다고”와 “나는 빵OO이 먹고싶당”라고 말한 발언을 성희롱으로 인정했다.

64시간 만에 2000만원 이상 모여

김씨는 인터넷상에서 ‘98년생 무고범죄자 김OO’로 알려져 있다. A씨가 김씨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입수해 자신의 SNS에 올리면서다. 김씨는 “이렇게 알려져 있다 보니 막상 고소를 당했을 때 비용이 감당이 안 되는데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이자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김씨는 “학생이다 보니 모아둔 돈도 없고 집안이 가난해 방법이 없었는데 이때 여성 문인들이 주변 지인들을 통해 비공개 모금을 해서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 이후 김씨의 항소 및 A씨에 대한 형사고소 비용을 위한 모금이 64시간 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7시에 시작했는데, 3일 오전 11시 기준으로 2000만원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김씨는 “처음에 변호사님이 모금 얘기를 했을 때 인터넷상에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큰돈을 받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며 “솔직히 금액을 못 채울 줄 알았다”고 답했다. 이어 “약 3일 동안 총 640건의 모금으로 돈이 다 모였다”며 “명단을 보니 여성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남성분들도, 익명도 많았다”며 “정말 감동이고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의 용기 위해 싸운다”

지난 4월에 열린 마지막 재판날, 그간 열린 8번의 재판에 계속 함께 해준 여성 연대자 두 명과 김씨의 대화. 김씨 제공

지난 4월에 열린 마지막 재판날, 그간 열린 8번의 재판에 계속 함께 해준 여성 연대자 두 명과 김씨의 대화. 김씨 제공

김씨는 이제 울지 않는다. 그는 “연대자들을 만나며 혼자가 아닌 걸 알게 됐고 마음이 편해졌다. 좋은 20대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김씨는 “그저 숨어있는 피해자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그것 때문에 이 소송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숨어있는 피해자도 많고 명예훼손으로 오히려 고소를 당하는 피해자도 많다”며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세상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계속 싸워서 피해자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희윤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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