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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팀이 수제의 건을···" 2021년 메일에 70년대 어투 쓴다, 왜

중앙일보

입력

수신자 제위: 
수제의 件, 하기와 같이 작성 후 공유 드립니다. 폐팀 업무 담당자 변경으로 일정이 지연되어 사전 양해를 구합니다. 
폐팀에서 기 소통한 메일은 다시 메일 첨부하여 송부드렸습니다. 추가 문의사항은 기안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생략)

바뀌지 않는 옛 관행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차장은 최근 타 부서에서 온 이메일을 확인하고 적잖이 놀랐다. 정중하고 격식 있는 글이었지만 한자어가 많이 섞인 문어체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전에도 이런 이메일이나 공문을 본 적이 있지만 요즘은 워낙 안 쓰는 말들이 많아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며 “의도는 알겠지만 솔직히 굳이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빠른 사회 변화에 따라 신조어와 유행어가 넘쳐나지만 상당수의 기업에선 수십 년 전 사용하던 단어와 문장이 그대로 쓰여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주로 한자어로 된 옛 언어는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이메일이나 공문서 등을 주고받을 때 쓰이는데, 언어의 본질이 원활한 소통이라는 점에서 보다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중앙포토]

[중앙포토]

국내 제조기업 박모(35) 과장은 “업무상 보내는 이메일은 ‘수제의 건’으로 시작하고 외부로 보내는 공문은 무조건 ‘평소 후의에 감사드립니다’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제’나 ‘후의’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부서에서 계속 써 오던 거라 그대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수제(首題)는 글의 첫머리에 쓰는 제목을 뜻한다. 또 후의(厚意)는 남에게 두터이 인정을 베푸는 마음이란 명사다. 수제의 건은 ‘위에서 말한 제목에 관하여’, 후의에 감사드립니다는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의 뜻인 셈이다.

문제는 박 과장의 사례처럼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관례에 따라 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입사 3년 차인 직장인 이성준(가명)씨는 “신입일 때 회사에서 평소 쓰는 말로 사내 이메일을 보냈다가 상사에게 ‘직장이 너희 집이냐’며 혼이 났다”며 “그 뒤론 정해진 포맷을 구해서 그때그때 이슈만 바꿔서 (지적당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쓴다”고 말했다.

소통 막는 ‘죽은 언어’ 

무엇보다 이런 글은 평소 쓰는 말과 거리가 멀어 조직원간 진정성 있는 소통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우리말의 약 70%가 한자로 구성됐지만 일상에서 쓰지 않는 사실상 ‘죽은 언어’인 경우엔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인상마저 줄 수 있다.
국내 화학 기업에 다니는 신모 과장은 “주로 법무나 회계 부서에서 한문이 잔뜩 섞인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며 “회사는 디지털 전환이니 ‘애자일(Agile·민첩한) 조직’을 강조하면서 앞뒤가 안 맞는다”고 비판했다. 이어 “저런 글을 보면 잘난 체하거나 형식만 중요시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국립국어원 이대성 공공언어과 연구관은 “격식과 예의를 갖추려면 한자어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중엔 과거 일본식 표현의 잔재도 있다”며 “쉬운 우리말을 쓰더라도 얼마든지 공손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변하듯 언어도 변해야 생명력을 갖는다”며 “말에 활력을 불어넣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어휘와 창의적인 표현을 너그럽게 수용하는 조직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국립국어원의 조언을 받아 쉬운 말로 고친 예시다.

어려운 이메일 또는 공문서 표현을 쉽게 바꾼 예시.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어려운 이메일 또는 공문서 표현을 쉽게 바꾼 예시.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최근엔 기업마다 카카오톡이나 사내 메신저를 사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면서 업무에서 지나치게 딱딱한 문어체를 쓰는 경우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일부 부서를 제외하면 ‘이메일 쓰는 방법’ 등 특정한 양식을 강제하기보다 빠르고 명확한 내용 전달을 더욱 강조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이대성 연구관은 “조직 내 언어문화는 임원 등 상층부의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며 “젊은 사람들이 쓰는 축약어와 신조어에 거부감을 가지면서 정작 본인은 한자어에 기대 어려운 말을 쓰면서 권위와 유식을 드러내려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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