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회화 기법 사 정립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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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술 내용을 살찌우는데는 새롭고 다양한 기법의 개발 및 활용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기법의 체계적 연구와 분석·해명에 이어지는 재현의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양식사와 함께 중요한 화축의 하나를 이루어야할 기법사가 부재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미술사의 연구방향을 재고해야한다는 반성의 소리들이 최근 미술계 일각에 대두, 주목을 끌고있다.
우리 나라에는 고대이래 수없이 많은 미술기법들이 개발돼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 미만하게 된 성리학에 기반을 둔 형이상학적 사유의 전통과 편향성 때문에 지필묵을 제외한 여타의 기법사 연구는 철저히 무시돼왔다.
따라서 우리 나라 미술사를 일별하면 기법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이 고답적인 양식사해설 뿐이며 연구방법론 역시 편년정리를 위주로 한 인문학적·서지학적 접근이 고작이라는 느낌이다.
미술사가들의 자세는 그렇다 치고 기법을 조형의 직접적 수단으로 삼는 창작당사자들도 이를 외면한 채 공소한 정신성과 아이디어만을 추구함으로써 그 틈바구니에서 기법사는 미술사의 사각지대로 남게 됐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대학에서의 동양미술사 강의는 중국의 남종화, 특히 오파에 정통성을 두는 문인화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미술사의 경우도 고구려벽화·고려불화·조선민화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회화의 다양한 기법에 대한 언급은 없이 『언제 누가 무슨 그림을 그렸고, 작품의 양식적 특징은 어떠하다』는 식의 피상적 편년 설명으로 그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미술기법 사 연구는 4O년대 근원 김용준이 저서 『조선미술사대요』를 통해 남긴 약간의 선구적 업적을 제외하면 황무지에 가깝다.
그후 70년대에 들어와 작가 이종상이 자기작품에 대한 이론화작업의 일환으로「벽화에 대한 신 연구」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기법사 연구의 새로운 단초를 열었으나 그를 이은 여타의 연구수준은 아직도 자의나 독단에 흘러 과학적 체계를 이루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김병종 교수는『우리 나라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미술기법이 수 백가지 이상 전해져오고 있는데도 이를 유지·계승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사장시키고 있다』며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전통기법과 용어를 찾아 정리하는 작업을 83년부터 시작해 개인적으로 5년 넘게 매달려오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동양회화용어기법연구사전』이란 가제 아래 약 2천 개의 항목을 정리해 놓았으나 이는 당초 예정했던 분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며 앞으로 3 ∼ 4년 더 매달리면 5천 항목으로 이루어지는 방대한 용어기법 정리작업이 완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작업에 투입되는 자금·일손이 엄청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고 김교수는 말했다.
부정확한 소문이나 몇몇에 의한 비부의 형식으로만 기법연구가 이루어져서는 과학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특히 지금과 같은 기법사의 공백상태에서는 70년대에 채색화를 일본화의 아류로, 우리고유의 극사실 기법을 서슴없이 서양 하이퍼리얼리즘의 모방으로 재단하던 명백한 잘못들이 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미술계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법사의 정립을 위해 벽화 등 고대미술기법의 보고가 되고있는 북한 미술사학계와의 합동연구, 국내학자들의 집단참여에 의한 부문별 전문연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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