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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史劇 코미디 '황산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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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천재 박중훈의 원맨 쇼? 없다. 역사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며 거창하게 '썰'을 푸는 감독의 자의식? 역시 없다. 웃기겠다는 강박증에서 남발되는 억지스런 상황? 전혀 없다. 대신 1343년 전 백제는 호남 사투리를, 신라는 영남 사투리를 썼을 거라는 예사롭지 않은 가정 위에 온 출연진이 몸을 던진 팀 플레이에서 빚어지는 포복절도할 웃음이 있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사극 코미디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오랜만에 만나는 코미디다운 코미디다. 웃음 속에 진지한 주제의식을 담는 것이 모든 코미디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면 '황산벌'은 그 지향점에 상당히 가까이 갔다.

'황산벌'의 웃음은 이 시대의 호흡을 잃지 않으면서 '가벼움'이란 함정을 피해 갔다. 정신없이 웃는 가운데 전쟁이란 결국 극소수 권력자들의 주사위 놀음이요, 권력 다툼이란 이름 없는 한 백성의 가을걷이보다 명분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데서 이 영화의 뚝심이 느껴진다.

◇너희는 '악의 축'!=영화는 서기 660년 당나라와 고구려.백제.신라가 4자 회담을 벌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황산벌'의 밑그림 격인 이 대목은 이 영화가 단지 옛날 옛적 삼국시대를 그리는 데서 벗어나 오늘날을 이야기하려는 풍자극임을 일러준다.

고구려와 백제에 조공을 요구하던 당 황제는 이들이 저항하자 "강대국이 까라면 까!"라며 두 나라를 '악의 축'으로 선포한다. 천하의 질서는 강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소국은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당 황제의 논리는 결국 약자를 치는 전쟁으로 비화된다.

"전쟁은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는 연개소문의 호통 등 다소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대사들에서 앞으로 진행될 '역사 뒤집어보기'가 심상치 않으리란 예감이 든다.

◇뭐시기 할 때꺼정 거시기 한다='황산벌'의 핵은 사투리다. 사투리는 백제와 신라 간에 '오해'를 부른다. 그 오해는 이 영화가 빚어내는 폭소의 시원지다. "우리의 전술전략적인 거시기는 한 마디로 뭐시기 할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죽을 때까지 갑옷을 절대로 벗지 않는다)"는 계백(박중훈)의 단순무식한 지시는 뜻밖에도 신라 진중에 암운을 드리운다.

신라 암호해독관은 문제의 '거시기'를 놓고 한자에서 존재하는 경우의 수 3백61가지를 뽑아오고, 김유신(정진영)은 "거시기의 정체를 파악할 때까진 총공격은 절대 몬한다카이"라고 선언한다. '개그 콘서트'의 생활 사투리가 그랬듯 '황산벌'에서 사투리 때문에 빚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혼돈은 두 나라의 차이, 나아가 오늘날 선거 때면 선연하게 드러나는 영.호남의 골을 실감케 한다.

◇한 끼 반찬이 40가지여!=이 영화는 걸쭉한 욕싸움을 통해 영.호남의 대결마저 웃음의 장으로 끌고 온다. 신라 병사들의 질펀한 욕지거리에 현기증을 느낀 백제 병사들은 "보성.벌교 애덜로 (선수를) 준비"시킨 뒤 "우리는 한 끼를 먹어도 반찬이 40가지가 넘어"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여기서 전장터는 한 판의 놀이판으로 변한다. 후반부를 채우는 황산벌 전투의 비장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오지명.이원종.김선아.김승우.신현준.전원주 등 특별출연 배우는 물론 누구라 할 것 없는 병사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거시기라고만 알아두쇼=비장한 황산벌 전투에서 죽음의 위기에 몰린 계백은 병사 거시기(이문식)를 탈출시킨다.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하나 남겨야 되지 않겄능가." 추수가 한창인 들판, 어머니와 거시기가 상봉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풍기는 '사람 냄새'의 최대치다.

계백이 비록 자신은 처자를 죽이고 나왔을지언정 그를 살리고 싶어하는 것은 전쟁의 허망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승자인 김유신이라고 다를까. "와 이리 덥노?""겁나게 덥구마"라는 두 수장의 마지막 대화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각축을 벌이는 오늘날의 꼭 닮은 현실에 비수를 꽂는다. 1343년 전의 역사는 이렇게 웃음 속에서, 그리고 가슴 찡함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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