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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박정희 이례적 환대…부시, DJ ‘디스맨’ 호칭 논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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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호 08면

[SPECIAL REPORT]
바이든 시대 첫 한·미 정상회담 D-7

역대 한·미 정상회담 #이승만, 1954년 아이젠하워 만나 #7억 달러 무상 원조 확답 받아내 #박정희, 베트남 파병 카드 평가받아 #전두환·레이건 ‘DJ 구명’이 쟁점 #부시, 전용 별장에 MB 특별 초대

17세기 이후 근대 국제 질서가 정착될 때부터 모든 국가는 ‘국가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론적으로 모든 국가는 동등한 권리를 갖지만 현실적으로는 늘 생존의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이런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스스로의 힘을 키워 생존을 지켜내는 ‘자력 구제(self-help)’를 실천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다른 국가의 힘을 빌려 생존을 지키는 ‘타력 구제(other-help)’를 강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7월 청와대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조깅을 함께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7월 청와대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조깅을 함께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가 간 동맹 관계는 타력 구제의 대표적인 옵션이다. 1948년 남북이 각각의 국가를 세운 이후 대한민국은 생존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미동맹 관계가 형성됐고, 이를 통해 모든 근대 국가의 최초 고민이었던 국가 생존의 문제도 해결됐다. 이렇게 생겨난 한·미동맹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21세기 들어 정상 외교는 더욱 활성화되는 추세다.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곧장 상대국을 찾아가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일이 다반사다. 정상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첫 한·미 정상의 만남은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 방미 때 성사됐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2주에 걸쳐 미국을 국빈 방문했는데, 오늘날 북한 지도자가 평양을 오래 비우며 리더십의 건재함을 과시하듯 당시 휴전 직후의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장기간 한국을 비우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53년 10월 체결된 한·미동맹은 이 전 대통령 방미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굳어지게 됐다.

‘디스 맨’ 호칭 논란을 낳았던 2001년 3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디스 맨’ 호칭 논란을 낳았던 2001년 3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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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확답을 받았던 무상 원조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받아냈던 유·무상 원조 5억 달러보다도 2억 달러나 많은 액수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정치적 요인에 의해 분단국이 됐던 독일·베트남 등과 비교할 때 어느 지도자보다 이 전 대통령의 외교력은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론의 여지가 없진 않지만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분위기는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만남 때 연출됐다. 1961년 미국을 처음 방문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박 전 대통령은 당시의 어색한 기억을 떨쳐내고자 두 번째 방미길에서는 의욕적으로 일정을 이어갔다.

존슨 전 대통령도 백악관 로즈가든 파티를 포함해 극진한 대접을 베풀었다. 당시 한국이 베트남전 추가 파병 카드를 쥐고 있었고 한·일 국교 정상화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점을 두루 고려한 호의였다는 평가다. 냉전 시기 미국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고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40%를 차지하던 시절이라 동맹 관계에서 한국이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던 상황을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인 환대였다.

반면 70년 한·미동맹 역사에서 껄끄러웠던 정상회담 또한 적잖았다. 1981년 1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광주의 아픈 기억을 뒤로하고 집권한 신군부는 이후 정권의 정당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고, 이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일거에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레이건 전 대통령이 당시 민주화 투사였던 김대중의 사면을 전제로 전 전 대통령의 방미를 허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러 뒷말을 남겼다. 당시 회담에서는 비핵화 등 많은 현안들도 논의됐지만 세간에는 이미 ‘김대중 이슈’만 부각된 뒤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골프 카트를 직접 몰고 부시 전 대통령과 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골프 카트를 직접 몰고 부시 전 대통령과 회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앙포토]

또한 역사는 항상 의외의 반전을 만든다. ‘전두환·레이건’ 회담의 핵심 쟁점이었던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나섰던 미 행정부가 정확히 20년 만에 반전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2001년 3월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한·미 외교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디스 맨(this man)”이란 멘트를 남겼다.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 때 햇볕 정책에 대해 강한 믿음을 피력한 김 전 대통령을 소개하면서다. 외교가에서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한해 박 전 대통령과 마주한 1979년 7월 정상회담과 더불어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꼽힌다.

냉전기 최고의 분위기가 ‘박정희·존슨’ 회담이었다면 냉전 종식 이후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자리는 ‘이명박·부시’ 정상회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 대통령은 미 대통령 전용 별장에 초대받은 몇 명뿐인 외국 정상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코리아 외교’는 차기 미 행정부에도 이어지면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워싱턴DC 근교의 한국 식당에까지 불러내는 저력을 보였다. 포스트 냉전 시대에 미국이 지구촌 현안을 혼자만의 힘으로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간파한 당시 한국 정부가 ‘한·미동맹의 글로벌 버전’을 제시하면서 미 대통령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셈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동아시아 안보 질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정착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50년 이후 20년마다 동아시아 안보 질서는 구조적 판을 바꿨다. 20년 뒤인 1970년엔 미·중 화해로 대표되는 데탕트의 문이 열렸고, 또 20년 뒤인 1990년엔 냉전 종식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2010년엔 글로벌 금융 위기를 전후로 미·중 갈등의 막이 올랐다.

한국 정부와 대통령은 이 같은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 왔을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냉전 질서가 시작된 1950년 무렵부터 10여 년 뒤인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전 대통령을 만나 어색한 모습으로 국제 질서를 논했고, 1970년 데탕트 10여 년 뒤인 1981년 전 전 대통령은 ‘미국을 통한 인정 외교’를 추구했으며, 1990년 탈냉전 10여 년 뒤인 2001년 ‘김대중·부시’ 회담에서는 의도치 않게 자존심을 구겨야 했다.

이제 2010년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고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처음으로 마주 앉는다. 20년마다 바뀐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변화에서 매번 뒤처졌던 한국 지도자들의 사례가 또다시 반복될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는 21일 워싱턴 회동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냉전사의 인식』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현재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와 한국세계지역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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