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괴롭힘 가해자 ‘지하실 근무’ 분리 조치는 인권침해”

중앙일보

입력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사진 JTBC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사진 JTBC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기 위해 가해자의 근무 장소를 변경하더라도 환경이 열악한 지하실 등으로 지정하는 조치는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국가인권위원회가 판단했다.

12일 인권위에 따르면 한 학교 직원이었던 A씨는 자신의 근무 장소가 지하실로 변경돼 인격권 및 건강권이 침해됐다고 진정을 제기했다.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던 A씨는 지난해 3월 다른 직원들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욕설을 하고, 업무를 전가하는 등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됐다. 학교 측은 조사를 한 뒤 A씨의 근무 장소 변경 및 시말서 작성 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A씨는 학교 지하 1층 공간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는 전 학교 이사장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지난해 8월 해임되기 전까지 이 지하실에서 근무했다.

학교 측은 직장 내 괴롭힘을 확인한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할 필요가 있었고, 과거 학교 버스 운전기사들이 휴게실로 쓰던 곳이었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측이 지하실을 현장 조사한 결과 해당 공간은 자연 채광이 되지 않고 공기가 순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초기가 보관돼 있어 심한 기름 냄새가 나는 것으로 파악됐다. 관할 교육청도 학교 측에 A씨의 근무 장소를 다시 지정할 것을 검토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학교 측은 A씨가 별건으로 해임될 때까지 사무 공간을 조정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단순히 피해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학교 측의 항변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학교 측이 A씨에게 제공한 근무 장소는 사무환경 측면에서 매우 부적절하다”며 “일반적으로 사무공간이 지상층에 배치된 것과 달리 지하 1층에 위치한단 점에서 A씨에게 심리적인 모멸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에 대해 근무 장소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행위자에게 건강을 해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의 사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해당 학교 측에 향후 유사한 사안을 처리할 경우 인격권 및 건강권을 고려한 분리 조치를 시행하라고 권고했다.

나운채 기자 na.unch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