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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권력 감시하랬더니 권력 다툼하는 공수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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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지난 1월 21일 경기도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김 처장은 취임사에서 ″항상 겸손하게 자신의 권한을 절제하며 행사할 것″이라고 했다. [뉴시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지난 1월 21일 경기도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김 처장은 취임사에서 ″항상 겸손하게 자신의 권한을 절제하며 행사할 것″이라고 했다. [뉴시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또 분란을 일으켰다. 이번엔 공수처 업무 처리를 위한 사건 사무규칙을 발표하면서 민감한 사항을 덜컥 끼워넣었다. 공수처는 사건 접수, 피의자 조사 관련 내용과 출석요구서 서식 등을 공개하며 최근 검찰과 정면 충돌했던 ‘조건부 이첩’을 아예 조항으로 만들어 어제 공포했다. 공수처가 직접 수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을 검찰에 이첩한 뒤 검찰이 수사를 마치면 다시 돌려받아 공수처가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기소 권한을 가진 검찰에 수사만 시킨 뒤 기소권을 넘기라고 하면 마찰이 불가피하다. 더욱이 이 문제를 놓고 공수처와 검찰이 한 차례 큰 진통을 겪은 직후다. 두 기관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출국금지 사건 수사를 두고 대립했다. 검찰이 지난 3월 이 사건을 공수처로 이첩했으나 공수처는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검찰에 재이첩했다. 그러면서 ‘수사 뒤 공수처로 송치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검찰은 공수처 요구를 일축하고 김 전 차관 출금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른 혐의로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활동한 이규원 검사와 법무부 차규근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을 기소했다. 아직 인력도 못 채운 공수처가 검찰과의 불협화음을 유발한 셈이다. 갈등의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공수처가 재차 ‘조건부 이첩’을 강행했다.

검찰에 이첩한 사건, 공소권은 갖기로 #“다른 수사기관 지휘 속셈” 반발 자초

공수처는 이 규칙이 대통령령에 준하는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수사기관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공수처 규칙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는 법학자의 의견이 많다. 검찰 안팎에선 “공수처가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하겠다는 거냐”는 항의가 쏟아진다.

새로 출범한 기구인 만큼 공수처가 다른 수사기관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일부 혼선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공수처가 올 초 출범한 이후 국민에게 하나라도 신뢰를 준 일이 있느냐는 점이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피의자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자신의 차를 보내 뒷골목 접선 방식으로 모셔와 면담한 사실이 들통나 망신을 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학 동문으로 실세 검사인 이 지검장에게 굽신거린 처신으로 비쳤다. 이와 관련해 허위 보고서 작성 의혹으로 고발된 신세다. 출범 넉 달이 되도록 공수처 구성도 마치지 못했다. 그나마 선별해 올린 인력 중 상당수는 청와대에서 커트당했다. 이런 처지에 논란이 된 규칙을 충분한 협의 없이 밀어붙이는 건 무슨 속셈인가.

권력을 감시하라고 만든 기관이 권력 투쟁에 골몰하는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계속 이런 식이면 현 정권이 검찰 개혁의 상징으로 내세운 공수처가 개혁 대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김 처장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이 과연 정치적 공격인지, 부적절한 판단과 언행이 자초한 시련인지 귀를 열어 보라. 국민의 믿음을 얻는 노력에 전념해 어느 정도 신뢰가 생겼다고 판단될 때 논쟁적 사안을 꺼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