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론] 대통령 재신임 法근거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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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측근의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해 개혁노선의 버팀목인 도덕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한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재신임 카드를 꺼내듦으로써 정국이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즉각 국민투표를 통한 재신임을 촉구하고 있고 민주당도 동조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의 재신임 여부는 단순한 정치공방적 논의의 차원을 떠나 정치질서를 규율하는 기본법인 헌법의 차원에서 검토돼야 한다. 대통령제는 정부 불신임권을 핵심 요소로 하는 의원내각제와 달리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민대표기관인 대통령이 헌법이 정하는 임기 동안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대통령제를 정부 형태로 채택한 우리 헌법도 대통령이 직무집행과 관련해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 때에 국회의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탄핵되는 경우 외에는 타의에 의해 그 직을 상실하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지 않다.

*** 대통령제 원칙 훼손

일부에서는 헌법 제72조에서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권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대통령의 재신임 여부에 관한 국민투표가 가능하다는 논지를 펴고 있으나 헌법의 기본체계에 비추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권의 요건은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관해 행사될 수 있는 것이며 대통령의 자질과 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이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이미 대통령선거를 통해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며 그 결정의 유효기간으로 대통령의 5년임기가 보장되는 것이다. 만일 대통령제에 부합하지 않는 중간평가제도를 도입하려면 명시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제도를 도입했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측근의 비리로 대통령의 도덕성이 추락해 국정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국가안위에 관계된다고 하나 이를 "중요정책 사항"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일부 정치인이 대통령 재신임에 대한 국민투표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음을 들어 신임투표의 연내 관철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입헌주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헌법에 의한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입헌국가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주요 권한은 헌법상의 근거가 필요하며 헌법이 규정하고 있지 아니한 권한의 행사는 인정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헌정사도 신임투표를 부정하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역대 한국 헌법에서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권은 1954년 헌법, 72년 헌법(소위 유신헌법), 80년 헌법(소위 5공헌법)에 규정돼 있는데 모두 "중요정책"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있다.

더구나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의 자유로운 국민투표 부의권을 통해 국회를 무시하려는 의도에서 중요정책의 내용을 제한하지 아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오는 사항이나 외교.국방.통일에 관한 사항과 같은 수준의 국가안위에 관한 사항을 국민투표 회부의 내용적 요건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헌정사에서 유일한 대통령의 신임투표적 국민투표가 있었던 75년 2월의 국민투표도 유신헌법의 철폐 여부라는 헌정 기본질서의 변경이라는 중요정책과 연계돼 있었다.

*** 탄핵절차 외엔 방법 없어

헌법의 기본정신을 보더라도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재신임론은 허용되기 힘들다.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헌법의 권력구조에서 그런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대표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한 공화적 권력수행을 추구하는 헌법정신을 위협하는 위헌적 수단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현재 거대야당이 오히려 국민투표에 의한 재신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즉흥적인 정략적 상황에 고무돼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데 동참하는 것으로 헌법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은 대통령과 거대야당 모두가 정략적 발상에서 벗어나 헌법정신을 무시하는 국민투표에 의한 재신임론 공방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내외 국가 현안의 합리적 해결에 머리를 맞대어야 할 시점이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