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환자 상담하러 찜질방 가는 유방암 전문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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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가슴을 절제한 유방암 환자들은 시원하게 목욕 한번 하고 싶어도 창피해 대중탕에 못 가요. 나라에서 신경 좀 써주면 안되나요?"

서울아산병원 유방암클리닉 안세현(48) 교수는 몇 해 전 강연회에서 한 환자가 푸념조로 던진 말을 쉽사리 머리에서 지워내지 못했다. 물론 정부에서 유방암 환자들을 위해 전용 목욕탕을 지어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아무 방도가 없는 걸까.

안 교수는 자신이 수술을 집도한 환자들의 모임인 '핑크리본' 회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매달 첫째 주 목요일에 병원 근처 찜질방에서 유방암 환자들끼리 만나는 '목욕하는 여인들' 행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안 교수도 흰 의사가운을 벗고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찜질방 모임에 합류했다. 환자들은 목욕하는 재미보다 평소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든 주치의와의 만남에 더 환호했다.

모이는 장소만큼이나 뜨끈뜨끈한 분위기의 이 행사가 이달로 1년을 맞았다. '핑크리본' 회원 100여 명은 1주년을 기념해 18일 장흥 유원지에서 안 교수를 위한 사은회를 연다. 연간 1000건 이상의 수술을 하는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목욕하는 여인들'과 매번 함께 해 준 정성에 감동해서다.

"하루에 보는 환자가 100여 명이나 되니 진찰만 제가 맡고 상담은 대부분 다른 전문의들이 합니다. 찜질방에선 제가 직접 한분 한분의 질문에 답변해줄 수 있어 다들 좋아하시죠."

환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안 교수는 질의응답이 끝나면 찜질방 한켠에서 즉석 진찰을 하기도 한다.

"유방암 환자의 재발률은 20%쯤 됩니다. 병원에도 하루에 서너 명씩 재발 환자가 찾아오죠. 하지만 걱정이 심하면 좋지 않아요. 마음을 편히 먹고 즐겁게 살아야 병도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수술 후 건강하게 살고 있는 '선배'들을 이 모임에 초대하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8년 전 유방암 3기 후반에 수술받은 40대 환자가 계신데요, 이분이 '내가 이렇게 건강한데 무슨 걱정들이냐'고 입을 열면 100% 말발이 섭니다."

안 교수는 "이처럼 환자가 환자를 돕는 방식을 통해 병원 진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게 내 본뜻"이라고 했다.

그가 다음달 초 병원 인근의 아파트 한 채를 빌려 문을 여는 '새순의 집'도 열성적인 환자들의 자원봉사로 꾸려갈 계획이다. 이곳은 항암.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오는 지방 환자들을 위한 쉼터. 안 교수는 "마음이 급해서 우선 제 주머니를 털어 아파트를 얻었는데 장기 운영을 위해 많은 분이 기부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유방암은 2001년 이후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으로 자리를 굳혔다. 연간 발병 증가율도 10% 이상으로 매우 높다(전 세계 증가율은 1.5~2%). 안 교수는 "독신 여성의 증가, 출산 기피 등 지난 10년간 급격하게 서구화된 사회 풍조가 주원인"이라며 "이를 되돌리긴 힘들기 때문에 정기 검진을 통해 조기 발견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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