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 청소부' 죽음…고기 200㎏, 독수리 식당 연 이유 [영상]

중앙일보

입력 2021.03.27 16:00

업데이트 2021.03.27 16:32

애니띵

애니띵’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고기를 보고 몰려든 독수리 떼. 유튜브 '새덕후'

고기를 보고 몰려든 독수리 떼. 유튜브 '새덕후'

경기 파주 민통선 부근의 한 들판. 오가는 사람 없는 고요한 이곳에 어른 키만 한 날개를 펼친 새들이 새까맣게 몰려듭니다. 곳곳에 떨어져 있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놓고 치열한 몸싸움을 벌입니다. 날카로운 부리로 고기의 살점을 뜯는 모습이 동물 다큐멘터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애니띵] '자연의 청소부' 독수리를 위한 식당

이 새의 정체는 바로 독수리입니다. 몽골과 중국 등지에서 서식하다 겨울이면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죠. 다 자란 성체의 날개 길이는 2m에 달합니다. 떼 지어 다니며 동물의 사체를 찾아 먹지만, 이렇게 수백 마리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진귀한 광경입니다. 이 조용한 들판에서 독수리들의 만찬이 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 3회, 고기 200㎏ 준비하는 '독수리 식당'

지난 13일 기자는 임진강생태보존회 회원들과 '독수리 식당' 준비를 함께 했다. 왕준열 PD

지난 13일 기자는 임진강생태보존회 회원들과 '독수리 식당' 준비를 함께 했다. 왕준열 PD

지난 13일 경기 파주의 한 들판에 임진강생태보존회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매주 세 번 열리는 '독수리 식당' 개업 준비를 위해서죠. 물론 진짜 식당을 여는 건 아닙니다. 겨울철 파주 일대에 머무는 독수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자원봉사를 말하죠.

아침 9시가 되자 회원들이 커다란 박스 8개를 트럭 짐칸에 줄지어 옮깁니다. 박스 안에는 20㎏이 넘는 돼지고기 덩어리가 들어있습니다. 인근 시장 정육점에서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부위를 사온 겁니다.

우리나라의 겨울 철새 중 몸집이 가장 큰 새답게 독수리는 먹성도 남다릅니다. 200㎏에 달하는 돼지고기를 들판에 뿌려두면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독수리가 몰려든다고 합니다. 그 많은 고기를 다 먹어치우는 데 15분이 채 안 걸린다고 해요.

하늘의 제왕? 사냥 못 하는 '청소부'

미국의 국조 흰머리수리. 같은 수리과로 분류될 뿐 독수리와는 다른 종이다. pexels

미국의 국조 흰머리수리. 같은 수리과로 분류될 뿐 독수리와는 다른 종이다. pexels

왜 사람이 '하늘의 제왕' 독수리에게 먹이를 줘야 하냐고요? 많은 분이 '독수리' 하면 미국의 국조(國鳥)인 흰머리수리를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흰머리수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독수리와 다른 종의 새입니다. 분류상 같은 수리과에 속해 있을 뿐이죠.

흰머리수리는 북아메리카 생태계 먹이사슬 최상단에 있는 포식자지만, 독수리는 사냥도 할 줄 모릅니다. 성격도 온순한 편이라 자기보다 한참 작은 덩치의 까치·까마귀에게 쩔쩔매기도 하죠. 주식은 멧돼지와 고라니 등 동물의 사체입니다. '제왕'보다는 '청소부'에 더 가까운 새입니다.

ASF·코로나로 굶주려…"먹이 줘야 피해 막아"

지난달 경기 연천에서 탈진한 채 쓰러져 있다가 구조된 독수리. 임진강생태보존회

지난달 경기 연천에서 탈진한 채 쓰러져 있다가 구조된 독수리. 임진강생태보존회

하지만 국내 생태계 변화와 동물 전염병으로 인해 독수리의 먹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2년 전 경기 파주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하면서 대대적인 멧돼지 소탕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사살된 멧돼지는 2차 오염을 방지하고자 생석회와 함께 땅에 묻혔죠. 농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독수리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철새 도래지에서 열리던 독수리 먹이 주기 행사가 취소되는 등 악조건이 겹쳤습니다. 먹이를 먹지 못해 탈진하거나 굶어 죽는 독수리가 속속 나오고 있죠. 지난달엔 경기 연천에서 굶주린 채 쓰러진 독수리 한 마리가 구조되기도 했습니다.

윤도영 임진강생태보존회 부회장은 "'독수리가 전염병을 옮기고 다니지 않겠느냐'는 걱정을 많이 하는데 오히려 사람이 먹이를 챙겨줘야 민가까지 내려가는 걸 막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떼 지어 몰려와 고기를 먹고 있는 독수리들. 유튜브 '새덕후'

떼 지어 몰려와 고기를 먹고 있는 독수리들. 유튜브 '새덕후'

따뜻한 보살핌 덕에 겨울을 무사히 보낸 독수리들. 날이 점차 따뜻해지면서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매 겨울 우리를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독수리가 더 늠름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박건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왕준열·황수빈 PD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