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사랑이 가정을 지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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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법무부는 2003년 9월 4일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양성 평등사상 등에 반하는 호주제도를 폐지해, 시대적 변화에 따른 다양한 가족형태에 맞는 선진적이고 평등한 가족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호주제 폐지와 더불어 자녀는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하나, 성(姓) 불변으로 인해 불합리한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일정한 경우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는 규정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입법 예고로 40년에 걸친 여성계의 노력이 열매를 맺는구나 하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 직후의 공청회, 국정감사에서의 논의 등을 보면서 낙관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경계심을 지울 수 없다.

*** OECD 국가 중 이혼율 2위로

정통 가족제도 수호 범국민연합 등 호주제 폐지 반대 견해는 호주제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폐지되면 가족질서의 붕괴, 조상과의 단절, 이로 인한 가족해체의 가속화 등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호적에 갈음할 새로운 개인별 신분 등록제 자체의 문제점과 준비 부족, 도입에 드는 비용과 노력의 낭비 등을 이유로 드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 호주제에서의 가(家), 즉 가족 개념은 우리 국민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 즉 혼인한 부부와 그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실제 가족이 모두 동일 호적에 등재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또 조상과 후손이라는 관계는 세대 간의 혈연관계 자체로 발생하고, 호적이라는 동일한 공부에 기록하는지 여부에 따라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족해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라는 최근의 통계에 의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호주제가 가족해체의 한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호주제가 가족해체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호주제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가족해체가 심각한 수준으로,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호주제의 존치로 가족해체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최근 TV드라마나 호주제 철폐 운동을 보면, 부모의 사별이나 이혼 등으로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자녀들이 성(姓)과 관련해 고통받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호주제를 폐지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가족해체에 어떠한 원인도 제공한 바 없는 자녀들이 호주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사회 전체가 이를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족해체 그 자체만으로도 자녀들에게는 가혹한 일임에 분명하고, 해체된 가정의 자녀들도 우리 사회가 보살펴야 할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주제를 폐지하고 호적에 갈음하는 개인별 신분제도를 도입해서 이러한 사정을 남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나 부정적인 평가 자체가 해소돼야 한다.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 자녀 姓.本 변경 신중 기해야

개인별 신분제도를 도입하려면 추가의 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평등한 가족제도를 구현하고, 새로운 가족형태의 구성원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다.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이런 점에서 자녀의 성.본 변경에 부모의 협의나 법원의 허가를 얻도록 한 법무부의 개정안이 타당하다.

현행 민법상 호주의 권한은 매우 작아서 상징적인 의미만 갖는다. 그럼에도 이를 폐지하여야 하느냐고 폐지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호주제의 근본문제는 상징성에 있다. 또 사회구성원의 반이 수십년 동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는 호주제를 고수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호주제가 가정을 지키는가? 가정은 사랑이 지킨다는 구호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조수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