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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쐈습니다” 광주 계엄군 유족 찾아 첫 사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죄송합니다.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사죄를) 망설였습니다.”

41년 전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 #“비무장 젊은이 2명 무의식적 사격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흐느껴 #희생자의 형 “용기내줘서 고맙다”

1980년 5월 23일 광주광역시(당시 전남 광주) 남구 노대동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 7공수여단 소속의 계엄군이 쏜 총에 한 남성이 숨졌다. 총을 쏜 계엄군이 그때부터 잊지 못했다는 피살자의 이름 세 글자는 ‘박병현’이었다.

41년 만에 유가족 앞에 선 그 계엄군 A씨는 무릎을 꿇은 채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 접견실에서 고(故) 박병현씨의 형 박종수(73)씨 등 유가족이 만난 자리에서다.

지난 16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오른쪽)이 자신의 총격으로 숨진 박병현 씨 묘소를 참배하고 박 씨 유가족을 만나 사죄했다. [사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지난 16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오른쪽)이 자신의 총격으로 숨진 박병현 씨 묘소를 참배하고 박 씨 유가족을 만나 사죄했다. [사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이날 만남은 A씨가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를 통해 자신이 숨지게 한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뤄졌다.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이 특정 희생자의 유족에게 사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5·18 조사위에 따르면 A씨는 이날 박씨 유가족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한참을 흐느끼다가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고 입을 뗐다. 그는 “40여 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가해자가) 유가족 앞에 서면 또다시 상처를 줄까 봐 41년 동안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조사위 앞에서 박씨가 숨지던 그 날을 또렷이 증언했다. A씨는 “80년 5월 23일 1개 중대 병력이 광주 외곽을 차단할 목적으로 정찰 임무를 하던 중에 화순 쪽을 향해 걸어가던 젊은 민간인 남자 2명을 발견했다”며 “당시 부대원들이 ‘도망가면 쏜다’고 경고했지만 박씨 등이 겁에 질려 도주하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사격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 농사일을 돕기 위해 고향인 보성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A씨는 박씨가 계엄군에게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한 채 죽어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사망 현장 주변에 총기나 위협이 될만한 물건은 전혀 없었다”며 “그들이 공수대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실도 없고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치던 상황”이라고 했다.

박종수씨는 죄책감에 고개조차 제대로 못 드는 A씨를 오히려 다독였다. 그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용기를 내서 자신을 찾아줘 고맙다”는 말도 전했다.

A씨와 박씨의 유가족은 사과와 화해의 만남을 마친 뒤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묘소 앞에서 참배했다. 5·18 당시 계엄군이 특정 희생자 묘소 앞에서 사죄한 것도 전례 없던 일이다. 5·18 조사위 관계자는 “80년 5월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이 목격한 사건을 증언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가해자가 특정 희생자를 기억해내 유가족을 만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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