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력 다한 환자들 비명도 못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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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이 턱없이 부족해 철제 캐비닛 위에 어린 부상자들을 눕혀 놓고 있었다. 항생제.링거.진통제.붕대 등 기초 의약품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 용천역 폭발 참사 직후 사고 현장을 방문한 세계식량계획(WFP) 베이징(北京)사무소 제럴드 버크(47)대변인은 28일 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부상자 360명이 이송돼 있는 신의주 인민병원에서 환자들은 치료는 엄두도 못 낸 채 '그냥 누워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2년 전부터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식량 구호활동을 해온 버크는 현재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 그가 찍은 사진은 AP.로이터 등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돼 참사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졌다.

WFP 사업을 위해 원산과 함흥 지역을 시찰할 예정이던 그는 지난 24일 청진을 거쳐 2박3일 동안 용천 사고 현장과 신의주 인민병원을 둘러봤다. 그는 "이례적이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그랬는지 북한 측에서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바로 평양에 전화해 현장 방문을 주선해 줬다"고 설명했다.

버크는 "얼굴 부위를 심하게 다친 환자들은 음식물을 입에 넣지도 못했다"며 "WFP가 지원하는 신의주 식품공장에서 비타민과 미네랄이 섞인 곡물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 빨대로 마시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크에 따르면 병원에는 많은 어린이가 눈 주변에 상처를 크게 입은 채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눈을 잃은 14세 소년, 얼굴이 석탄 덩어리처럼 완전히 까맣게 그을린 54세 여성, 얼굴에 유리 파편이 박힌 어린이 등 부상자들이 복도와 병실 등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일부 치료를 받은 부상자의 상처는 보기에도 엉성하게 꿰매 놓았다는 것이다.

"기력이 없어서인지 비명을 지르는 환자도 없었다. 서로의 처참한 모습에 놀랐는지 무거운 정적이 병원을 짓누르고 있었다."

용천 사고 현장 인근 가옥의 지붕은 대부분 날아갔고, 빌딩은 골조만 남은 모습이었다. 열차들은 까맣게 그을리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휘기도 했다. 주민들은 폐허의 도시를 서성거리며 가재도구를 주우러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복구 작업은 손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삽으로 벽돌과 잔해들을 손수레에 주워 담아 옮기는 식이었다. 완전히 무너져 골조만 남은 건물, 무너져내린 아파트 등은 손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민들이 서성대고 있었다. 고물 불도저 4대가 사고 현장에 동원됐지만 한대도 작동되지 않았다." 버크는 "용천 사고 현장과 신의주를 오가며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예전과 달리 북한 측에서 제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WFP는 1995년부터 북한에 사무소를 설치, 식량 지원 사업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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