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읽기] "여보, 사실은 나 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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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나의 나약함을 보여줘도 될까. 만일 그러면 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 20년째인 P씨(48)는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내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신이 없어 번번이 생각에만 그친다.

P씨는 막연히 인생이란 게 수월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하지만 요 몇년간은 삶에 짓눌려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졸업 후 그는 괜찮은 회사에 취직이 돼 비교적 평탄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만난 아내 역시 살림살이와 애 키우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사는 보통의 전업주부다.

이렇듯 무난한 가정을 꾸려오던 그가 삶이 고달파지기 시작한 것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세계화.정보화 시대는 뭔가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만 찾는 분위기다. 게다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자신 같은 간부사원은 상시 구조조정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돌이켜 봐도 그간 직장에서 딱히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묵묵히 했으며 상사의 불쾌한 억지도 그냥그냥 받아넘겼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는 회사에서 늘 겉돌고 밀리는 느낌이다. 실제 2년 전 지금의 자(子)회사로 밀려(?)오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의 자리도 불안하다. 올 겨울 독감에 걸려 온몸이 쑤시고 아팠을 때도 결근은커녕 퇴근시간까지 자리 한번 못 비웠다. 요즘 상사는 물론 부하직원 눈치까지 보며 산다. 이토록 자신은 힘겹게 지내지만 집에 돌아와 보면 아내는 늘 무사태평이다. 자신이 언제까지 건강한 몸으로 처자식을 부양하리란 굳건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P씨는 외롭다.체력도 떨어지고 사회적 위치도 불안한데 어느 날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이 상실감을 혼자서만 감내해야 한다.

P씨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벅찬 삶을 꾸려가는 이 시대 보통의 중년 아버지를 대변한다. 해방 후 모두 다 가난했기에 가족들 끼니 걱정만 안 시켜도 아버지들은 집안에서 가장 대접을 한껏 받고 살았다.

반면 지금의 수많은 중년 가장들은 가족을 '잘'부양해야 한다는 짐을 진 채 사오정 대열에 끼이지 않으려고 벅찬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럴 땐 가정이라도 안식처가 돼야 하는데, 아내는 남편을 신경 써서 챙겨줄 마음도 별로 없어 보인다. 독감을 앓을 때조차 아내는 '나이 들더니 남들 앓는 병은 다 앓고 지나간다'며 핀잔을 주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선 가장인 당신이 힘든 상황을 아내와 나누면서 극복해야 한다.

우선 아내에게 당신의 지치고 힘든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자. 그래서 당연시하던 당신의 노고에 대해 아내가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야 한다. 그래야 아내는 가정을 지키는 일원으로 제 역할을 찾아 노력할 것이다.또 아내에게도 당신이 몸져눕거나 실직이 현실로 닥쳤을 때를 대비할 수 있도록 인식시켜야 한다.

부부는 사랑만을 나누는 연인이 아니다. 힘들 때 함께 손잡고 역경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생의 동반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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