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상' 보이지 않는 서울…"요사한 귀신" 세종 성상파괴 의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나는 이 나라 어디에도, 혹은 서울 내의 어디에도 우상이나 우상을 모신 사원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놀라웠다.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신들을 위한 사원을 세우지 않는 것 같았다."

고려때는 개경 곳곳에 신상과 사당 빼곡 #조선중기 이후 유생들이 신상파괴운동 벌여

1885년 서울을 방문한 성공회 선교사 J. R. 울프가 남긴 기록의 일부다. 서양인들의 눈으로 볼 때 '이방 종교'의 전형적 특징인 '우상'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기이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때 송나라에서 온 사신 서긍이 남긴 기록은 조금 다르다.

지리산 성모상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지리산 성모상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귀신, 사직, 영성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한다… (개경) 태화문 안에 있는 복원관에는 삼청상(옥황상제·노자·장자)아 그려져 있는데, 노자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이어서…" (『고려도경』)

이에 따르면 수도인 개경에는 크고 작은 불교와 도교의 사원이 가득했고,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인 동신성모(東神聖母)의 목제 신상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 국왕도 신상으로 만들어져 숭배의 대상이 됐다. 또 개경을 비롯한 각지에는 산신을 모신 신당이 있었고, 국가에선 이런 산신에게 공(公)·후(侯)·백(伯) 같은 작호를 내리고 국가에서 제사도 지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해보면 한국과 달리 공자의 거대한 조각상이나 각종 지역신을 모신 사당과 신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이 19세기 후반엔 어째서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었을까.

지난달 27일 출간된 『무당과 유생의 대결-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은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추적한 교양학술서다. 저자 한승훈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에 따르면 조선 중반 성리학 질서가 강화되면서 사대부들이 벌인 무속 퇴치와 성상파괴운동이 현재와 같은 '우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7일 한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승훈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한승훈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지금은 왜 다양한 전통 신상을 볼 수 없게 됐나
고려말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성상반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충숙왕의 명령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주요 성현들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모시기로 하자 유생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그래도 조선 전기엔 도읍인 한양에서는 신상을 두지 않더라도 개성 같은 곳에 두는 것은 용인해줬다. 그런데 사림이 정권을 잡는 조선 중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1566년엔 100여명의 유생이 송악산의 유서깊은 월정당이나 최영 장군을 모시는 덕정당까지 불태웠다. 또 나무 신상을 끌어내 깨부수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뜨렸다. 지방관의 만류에도 듣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는 세종의 역할도 컸다.
세종이 신상파괴운동의 시초라는 이야기인가?
세종도 즉위 초엔 어머니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리자 송악산, 백악산 등의 산신과 성황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소격전에 사람을 보내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효도의 차원이었고, 세종 자신은 신상 파괴와 산신에게 내려진 작호를 박탈하는데 의지가 강했다.  그는 인격화된 신들의 가족을 "요사한 귀신"이라고 했고, 1430년(세종 1년)엔 '각도산천단묘순심별감'이라는 위원회를 설치해 각 지의 산천신과 성황신을 조사하고 개혁안을 제출하게 했다. 예를 들어 이성계 가문이 출발한 영흥에에는 '성황계국백지신'이라고 불린 성황신이 있었고 나무로 된 남녀 신상 6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개혁안에 따라 신상은 모두 철거되고 유교식 제사로 대체하기로 했다.
공자의 신주를 모신 위패 [중앙포토]

공자의 신주를 모신 위패 [중앙포토]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선물한 공자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다. [중앙포토]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선물한 공자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다. [중앙포토]

신상을 파괴한 뒤 그 자리에 대체된 것은 없나
간단히 말하면 신상을 섬기는 건 사이비라고 봤고, 신상 대신 신주(神主)로 대체했다. 규격도 표준화했다. 밤나무 재질로 만들어,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신의 이름만 표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붙은 칭호도 다 삭제했다. 예를 들어 단군이나 기자에게 붙은 '조선후(朝鮮侯)' 같은 작호도 뺐다. 어찌보면 서구에서 가톨릭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 운동과도 비슷하다. 여기엔 당시 국제적 환경도 영향을 줬다. 명나라를 건국한 세력도 '몽골의 잔재'라면서 수도 남경에서 신상을 없애고 신주로 대체하게 했다. 다만 명나라에서 이런 신상파괴운동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는데 조선에선 수 백 년 간 이어졌다는 게 다르다.
일각에선 기독교든 성리학이든 한국에 들어오면 본토보다 더욱 교조적이고 원리주의적으로 강경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측면이 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운동도 서구에선 19세기 말에서20세기 초에 반짝했는데, 한국에선 오래 유지됐다. 혹자는 융통성 없고 과격한 민족성에서 찾기도 하는데, 사실은 '주변부 의식'이라는 차원인 것 같다. 중심부에서 멀어져 있지만, 오히려 정통을 가장 순수하게 지키려고 하는 현상이다.
김금화 무당 굿 장면 [중앙포토]

김금화 무당 굿 장면 [중앙포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지방 수령들이 공개적으로 신상을 철거하고 무당을 탄압하는 행위로 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 야사에서 수령이 귀신을 보고 놀라 죽거나 승려를 탄압하다가 벌을 받는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유생과 무당의 대결, 그리고 무속이 살아남은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느 문화에나 종교적 수요가 있다. 복을 바라고 재앙을 회피하려는 기복양재(祈福禳災), 성인이 되고자 하는 구도(求道), 또는 비를 내리기 바라는 바람도 있다. 유교가 구도나 기우제 등은 흡수했지만 기복양재를 대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