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의료원]사람 살린 '프로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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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빠른 검사결과 통보로 중환자 생사의 기로에서 벗어나

긴박한 상황이었다. 패혈증으로 추정되는 환자 한 명이 응급실에 실려온 것은 지난 달 중순. 체온은 39도에 이르렀고, 한 눈에 봐도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 의료진들은 급히 패혈증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쓰는 항생제를 투입했으나 허사였다.


3일째가 되도록 환자의 체온은 떨어질 줄 몰랐다. 패혈증 중에서도 화농성 담도염에 의한 질환의 경우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긴장감은 갈수록 고조됐다. 의료진들은 과거 손도 못 써보고 보낸 다른 환자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원인균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람음성 간균이 자라고 있으니 항생제를 그 쪽으로 바꾸세요.” 의료진들은 급히 항생제를 바꿨고, 환자는 거짓말처럼 정상을 되찾아갔다.

의료영화나 의학 드라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일은 실제로 지난 달 한양대구리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의료진에게 전화를 준 장본인은 진단검사실 조기섭 주임. 당시 의료팀의 일원이었던 현일식 주치의는 “조 주임의 전화는 정말 중요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패혈증의 원인이 되는 균은 종류가 많다. 음성, 양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첫째 기준이며 간균, 구균, 쌍구균 등으로 나뉘는 것이 또 다른 기준이다. 그 두 기준에 따라 음성간균, 양성구균 등으로 특성을 구분 짓는데, 각각 듣는 항생제는 다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쓰는 항생제에 환자가 반응하지 않으면 최대 6일이 걸리는 반응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 일을 조 주임은 불과 3일만에 해냈고, 그 결과 환자 한 명의 목숨을 살렸다.

그러나 조 주임에게 이 모든 결과가 업무에 충실한 결과일 뿐이다. 주위의 칭찬에도, 그는 “그게 내 직업인데”라며 손사래부터 친다. 기자의 기사화 제안에도 '일 열심히 하는 것도 미담이냐'며 전화를 끊어버리려 한다.

검사 결과 통보는 진단검사의학과의 임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과를 통보해주면, 다 아는데 뭘 또 알려주느냐"며 퉁명스럽게 구는 사람들도 많다며 “오히려 고맙다고 치켜세워 주는 이가 더 고맙다.”라며 끝내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직업 신조가 낳은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미생물 담당팀의 김준식 의료기사는 “일을 맡기면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주세요. 차라리 해결책을 주지, 중도하차 시키지는 않으시죠.”라며 그의 직업관을 설명한다.

이어 김 기사는 평소 조 주임은 필요한 기구들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하는데 지장이 있을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의 평소 직업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목숨을 건진 환자를 만나보았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검사를 맡았던 환자를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고, 이번 환자도 다른 환자들과 같이 당연한 업무로 담당했을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현일식 주치의는 "덕분에 이제 환자가 식사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됐고, 퇴원만 앞두고 있다"고 귀띔해 준다. 올해로 만 20년째 병원생활을 한다는 조기섭 주임. 그의 투철한 직업 정신이 유달리 추운 올해 겨울을 훈훈하게 만드는 미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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