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에이즈 하루 1.4명꼴 감염 "편견과 차별이 더 무서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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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감염된 金모(35)씨는 올 겨울 독감 예방주사를 맞지 못했다. 그는 "동네병원에서 에이즈 감염자라고 밝히자 간호사가 갑자기 백신이 떨어졌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며 "간호사가 혹시 주사바늘에 찔려 전염될까봐 조심하라는 뜻이었는데…"라며 씁쓸해 했다.

지난해 12월 투병 끝에 숨진 감염자 李모(당시 45세)씨는 죽기 전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신을 해부할 때 사용한 수술도구를 다시 사용할 수 없어 난감하다"며 병원 측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1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에이즈의 날'. 유엔에이즈퇴치계획(UNAIDS)은 최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올 들어 전 세계에서 5백여만명이새로 에이즈에 감염됐으며 올해 사망자는 3백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루 평균 8천여명이 숨지는 셈이다. 국내에서도 올 들어 9월 말까지 3백98명이 새로 감염됐다.

하지만 국내에선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너무 심하다. 이에 따라 2천4백여명(9월 말 현재)에 달하는 국내 에이즈 감염자의 인권이 무시되는 사례가 잦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유승철 실장은 "에이즈 감염자의 인권보호를 통해 이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야 효과적인 예방과 치료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무지가 부른 편견

에이즈퇴치연맹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팀이 최근 전국 성인남녀 1천9백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자료를 보면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잘 드러난다. 전체 응답자의 49.2%는 '키스하면 감염될 수 있다'고 답했고 34.9%는 '물잔을 같이 사용하면 감염될 수 있다'고 했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에게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영자(64.서울 고척동)씨는 "83세 노모가 에이즈에 감염될까봐 환자인 아들 얼굴 한번 만지지 않을 정도로 편견의 골이 깊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원주교도소가 에이즈에 감염된 수형자의 통합치료기관으로 결정된 후 원주시가 발칵 뒤집혔다. 반대 집회에서는 '교도소 담을 넘는 모기는 누가 책임질 수 있나'라는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갈 곳 없는 환자

에이즈 감염자가 환자로 진행되면 차별은 더욱 심해진다. 말기 에이즈환자들은 간병인을 둬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건강한 간병인을 구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에이즈퇴치연맹은 건강이 좋은 에이즈 감염인들을 교육시켜 에이즈환자에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간병인으로 활동하는 감염인 崔모(52)씨는 "병원에서 에이즈환자가 사용하는 물건이나 링거병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 놓고 식기도 다른 환자와는 다른 재질을 사용하는 등 철저히 격리시킬 때 내 앞날을 보는 것 같아 슬프다"고 말했다.

또 에이즈환자들은 '다른 환자들과 병실을 함께 사용할 수 없다'는 병원 내부규정 때문에 입원도 쉽지 않다. 숫자가 많지 않은 에이즈환자 전용병실이 모두 찼을 때는 비싼 1인실을 사용하거나 응급실에서 며칠씩 대기해야 한다.

특히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말기 에이즈환자들은 갈 곳이 없다. 꽃동네나 노숙자쉼터 등에서도 에이즈환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갈 곳 없는 환자들을 받아주는 곳은 에이즈예방협회가 서울.부산.인천 등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용쉼터 다섯곳이 전부다.

국립보건원 관계자는 "전용병원이나 요양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지만 주민 반발이나 의료진 확보 등의 문제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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