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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갱년기 친정 엄마 식욕 찾아준 일본산 칡뿌리 가루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히데코의 음식이 삶이다(11)

재색겸비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혜진이 연희동 요리 교실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2년이 지났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자기 목표나 꿈을 향해 노력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실현했으리라 짐작게 하는 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진학해, 전문직 커리어우먼으로서 활약해온 그녀는 40대 후반에 공직에 진출했다.

“엄마, 배고파. 밥 줘.”

현직에서 물러나 아마도 혜진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딸이 어학 시험을 보는 날 아침, 무기력한 상태로 며칠이나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딸의 말에 깜짝 놀란 혜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시험 보러 가는 딸을 위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차려줬다고 한다.

“그렇구나.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이렇게나 가까이에 존재하는구나.”

혜진은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평범하게 결혼, 육아를 경험한 혜진은 자신의 커리어가 최우선이어서 20년 이상 함께 살던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딸의 식사를 맡겨왔다. 아주머니는 딸의 식사뿐만 아니라 출근 전 아침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혜진에게 매일 아침 빼먹지 않고 토마토주스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거기다 일과 커리어가 전부였던 혜진은 평일 저녁에 요리해 딸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일이 드물었고, 주말에도 가족끼리 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음식을 만드는 혜진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 일막 일막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unsplash]

음식을 만드는 혜진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 일막 일막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unsplash]

아마도 그전에는 늘 목표를 이뤄낸 인생을 걸어와 실패나 좌절과는 연이 없었을 혜진은 일선에서 물러난 뒤 괴로움을 달랜다며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요리책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나의 요리 에세이나 요리책에 눈길이 갔고, 이를 계기로 연희동 요리 교실에 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월 1회뿐인 수업에도 눈에 띌 정도로 요리 실력이 빨리 늘었다.

“올여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느 해 초여름 병상에 누워 있던 시어머니를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가듯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혜진이 일본요리 책을 보면서 만든 니신소바를 맛있게 드셨다. 며느리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나는 한국에 살고 있으니 시부모에게 며느리로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할 기회는 많다. 하지만 일본에 계신 친정 부모에게는 1년에 몇 번이나 만들어줬는지, 함께 식탁을 둘러싼 적이 언제였는지, 하물며 일본에 돌아갈 때마다 마주하는 연로한 부모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에 쓸쓸함이 배어들었다.

나는 일본 친정 집에 머무는 동안 한국 요리를 부모님께 만들어 드린다. 입이 짧은 엄마는 어쩐지 잣죽을 좋아한다.[사진 unsplash]

나는 일본 친정 집에 머무는 동안 한국 요리를 부모님께 만들어 드린다. 입이 짧은 엄마는 어쩐지 잣죽을 좋아한다.[사진 unsplash]

일본을 떠나고 나서 가끔 집에 돌아가면 요리사인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싶어 내가 무언가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일본에 가기 전 늘 어머니가 전화로 부탁하는 것이 있다.

“근처 가게에 생닭 세 마리를 주문해놨어. 삼계탕에 넣을 인삼이랑 대추, 까먹으면 안 돼!”

삼계탕 요청이 들어오면 부랴부랴 경동시장에 가서 세관에 걸리지 않도록 재료를 조금 사 기내 수하물 가방에 넣는다. 친정에 가면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불효자식인 나는 그런데도 집에 있는 동안 드물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드리는데, 입이 짧은 어머니는 어쩐지 잣죽을 좋아한다.

“앞으로는 세계화 시대니까 해외에 나가서 살 거야.”

대학교 졸업식 다음 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리타 공항에 간 나는 어머니와 제대로 마주 앉아 장래에 관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스페인 행을 정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보다 네 살 어린 남동생은 엄마의 과잉 간섭과 방임주의 사이에서 꽤 흔들리며 사춘기를 보내온 탓인지, 자기 진로는 부모님에게 상담하지 않고 스스로 정해왔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어머니와 진지하게 서로를 마주한 적이 없다.

그러니 어머니가 잣죽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왜 잣죽을 좋아하는 것일까. 미각도 보수적인 어머니에게 처음 먹는 특이한 맛이기 때문일 리는 없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곁을 떠날 무렵, 딱 지금의 내 나이였던 어머니는 갱년기에 접어들었고 자율신경실조증 등 꽤 심한 갱년기 장애를 앓았다. 그런데도 고지식했던 어머니는 홀로 괴로운 시기를 넘기려고 대학생이던 남동생과 바쁜 아버지에게 상담도 구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에는 페이스타임이나 카카오톡 같은 통신 수단도 없었고, 유럽에 거는 국제전화가 1분에 얼마 하던 시대였으니 스페인에 사는 딸에게 자기 증상을 알리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향수병을 달래려 1년에 한 번 일본에 돌아간 나에게 “요 며칠간, 식욕이 없어서. 엄마는 이 칡뿌리 가루면 돼”라고 말했다. 홀쭉 마른 엄마는 1년 만에 만나는 딸에게 먹일 따뜻한 흰 밥과 된장국, 꽁치 소금구이 등 엄마가 직접 만든 일본 집밥을 식탁에 올렸다.

“딱히 병에 걸린 게 아니면 소고기든 생선이든 영양을 섭취해야지. 칡뿌리 가루 같은 거로 영양 보충이 되겠어?”

20대이던 딸은 엄마를 향한 배려심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

“칡뿌리 가루는 예로부터 몸을 따뜻하게 하고, 위장이 약해졌을 때 먹으면 좋다고 알려져 있어. 나가노에 계신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셨지.”

‘살아가기 위한 요리’란 무엇일까.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리를 통해 만난 혜진이 가르쳐준 테마다. [사진 unsplash]

‘살아가기 위한 요리’란 무엇일까.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리를 통해 만난 혜진이 가르쳐준 테마다. [사진 unsplash]

내가 젓가락으로 꽁치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엄마는 칡뿌리 가루를 따뜻한 물에 녹여 티스푼으로 한 입씩 입에 가져가 삼키고 있었다. 마치 살아가기 위한 힘을 몸 안에 집어넣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살기 위한 힘을 되찾기 위해 요리를 만들고, 먹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 칡뿌리 가루의 식감이 잣죽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 엄마가 잣죽을 좋아한 이유도 지금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50대 때 갱년기 장애를 극복한 엄마는 현재 83세다. 치매 증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매일 아버지와 산책하러 나가고 아버지가 만드는 요리를 즐기고 있다. 며칠 전 만난 혜진은 일주일에 몇 번은 자기 집에 찾아와 딸이 만들어주는 요리를 즐겼다는 아버지가 코로나19로 밖에 나가지 못해 사람과의 만남이 끊어져 버린 탓인지 우울한 상태에 식욕까지 없어졌다고 걱정했다. 입이 짧아진 아버지에게 무엇을 먹이면 좋을지 이것저것 고민하는 혜진에게 어머니의 칡뿌리 가루를 권했다. 바로 산 한국의 칡뿌리 가루는 일본 제품과 가공 방법이 달라서인지 꽤 쓴맛이 났다. 각자 한국의 칡뿌리 가루를 어떻게 요리에 이용할지 연구해보기로 했는데, 혜진의 아버지가 식욕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다. 연로한 부모의 식사를 걱정하는 혜진을 보고 있으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하게 보관해둔 일본산 칡뿌리 가루를 조금 나눠주었다.

‘살아가기 위한 요리’란 무엇일까.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리를 통해 만난 혜진이 가르쳐준 테마다.

키친 크리에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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