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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난치병, 절망과 싸운다. 下] 병원 찾아도 "원인 불명…"

중앙일보

입력

아들 강민석(24)씨가 11년째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일명 로렌조 오일병)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배순태(50.여.서울 도봉동)씨. 그녀만큼 기구한 삶을 사는 사람도 드물다. 장남은 1986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름 모를 병에 걸려 1년반 만에 세상을 떴다. 나중에 알고 보니 ALD였다.

마(魔)의 그림자는 둘째 아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93년 민석(당시 중1)씨가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잘 알아 듣지 못해 병원을 찾았다. 그 해 서울 대학병원에서 ALD일지 모른다고 해 미국에 혈액검사를 의뢰한 끝에 국내 처음으로 확진을 받았다. 당시 '로렌조 오일(ALD의 치료제)'이라는 영화를 본 뒤 미국에서 어렵게 그 식품을 수입했다. 裵씨는 ALD의 '개척자'였다.

희귀.난치병 환자들은 병을 천형(天刑)으로 알고 본인들이 걸머지고 간다. 발병 단계에서 치료까지 각종 장벽 앞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희귀병에 걸린 줄도 모른 채 원인불명의 병으로 알고 체념한다. 50만명으로 추정되는 희귀병 환자 중 1만3천여명만이 희귀병 확진을 받았다.

한 패브리병 환자는 열살 때인 70년부터 온 몸이 쑤시는 등의 증세가 나타났으나 98년에서야 확진을 받았다. 그 동안 신경통 진단을 받아 침을 수차례 맞았고 오리나 토끼 피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었다.

2백여종에 달하는 희귀병의 증세가 뭔지,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면 어디서 진단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고 그런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다. 조기 진단은 꿈도 못꾼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환자나 가족들이 나섰다. 현재 50여개의 모임이 질병 정보 제공, 의료비 상호 부조 등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 클리닉 유한욱 교수는 "희귀병은 초기에 발견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증세가 나타나면 그 때는 늦다"고 말했다. 치료제가 식품인 희귀병은 아예 제도권 밖에 방치돼 있다. ALD환자들이 먹는 로렌조 오일이라는 식품은 약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보험이 안돼 전액 환자가 부담한다.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한 병에 35만원가량 한다.

간병비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희귀병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해 24시간 간병을 받아야 한다. 간병비 부담 때문에 부모가 이 역할을 하다 보니 가계수입이 줄어드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는 연내에 ▲희귀병 환자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희귀병 전문 홈페이지를 구축해 정보를 공유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 내년 5월 만성병 관리법을 만들어 희귀병 지원 근거를 담을 예정이다.

한국 희귀.난치성질환 연합회 신현민 회장은 "국립의료원 등에 희귀.난치병 연구센터를 만들어 질병이나 진단.치료 정보를 제공하고 대학병원이나 제약회사와 연계해 치료약을 개발하는 등 희귀병을 국가가 총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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