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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정치 지도자 위상을 좌우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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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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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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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이 지난해 12월부터 전 세계 곳곳에서 접종에 들어가면서 각국의 내부 정치는 물론 국제정치에서도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백신은 정부 능력에 대한 국민 신뢰의 바로미터이자 정치 지도자의 권위를 받쳐주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국제정치에서는 백신을 우선 확보한 국가·지역과 그렇지 못한 곳 사이에 ‘백신 분열’과 ‘백신 격차’가 선명해지고 있다.

영국 존슨 총리, 지지율 올라가 #이스라엘은 3월에 다시 총선 #푸틴, 임시허가 뒤 지지 회복 #시진핑 “중화민족 부흥” 강조

백신이 내부 정치에서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은 사례는 영국·이스라엘, 그리고 중국과 미국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2020년 12월 8일 이 나라가 세계 최초로 코로나 백신의 일반 접종을 시작한 뒤인 12월 20일 조사업체 유고브가 실시한 지지율 조사에서 잘한다 56%, 못한다 35%를 기록했다. 이는 존슨 총리의 지지도가 바닥이던 4월 13일 조사에서 잘한다 26%, 못한다 66%였던 것과 비교해 극적인 변화다. 존슨이 소속한 보수당은 12월 26~30일 델타폴·데일리미러 조사에서 지지율 43%로 38%인 노동당을 5%P 앞섰다.

영국은 지난달 8일 세계 최초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의 일반 접종을 시작했다. 사진은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의 모습. [AP=뉴시스]

영국은 지난달 8일 세계 최초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의 일반 접종을 시작했다. 사진은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의 모습. [AP=뉴시스]

유럽연합(EU)보다 이른 지난달 19일 중동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빠른 백신 확보와 효율적이고 잘 준비된 보건의료 시스템을 바탕으로 백신을 초고속으로 접종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글로벌 데이터 사이트인 아워월드인데이타에 따르면 3일 현재 이스라엘의 백신 접종률은 14.14%로 바레인(3.62%)·영국(1.39%)·미국(1.38%)·덴마크(0.81%)·러시아(0.55%)·독일(0.32%)·캐나다(0.31%)·중국(0.31%)을 훌쩍 뛰어넘는다. 930만 이스라엘 인구 중 130만 명 이상이 접종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 백신 접종 선도국가로, 네타냐후 총리가 이를 이끈 유능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네타냐후가 글로벌 지도자 반열에 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 800만 회분을, 12월에는 모더나 백신 600만 회분을 각각 계약했다.

지난달 19일 백신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날 생중계되는 가운데 백신을 맞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19일 백신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날 생중계되는 가운데 백신을 맞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 의회는 지난달 22일 2021년 예산안 통과에 실패하면서 의회를 해산하고 오는 3월 23일 다시 총선을 치르기로 했다. 2년 새 네 번째 총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31일 조사기관 패널폴리틱스와 일간지 마리브가 실시한 조사에서 네타냐후가 소속한 리쿠드당은 차기 총선에서 29석을 차지해 제1당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 의석인 36석보다는 적지만 네타냐후가 비리 수사와 코로나 방역 등을 고려하면 긍정적인 결과라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현지 매체들이 평가했다. 네타냐후의 정적인 베니 간츠 국방부 장관이 이끄는 청백연합은 현재 15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론조사에선 2.6%의 지지율로 한 석의 의석도 건지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나타났다.

네타냐후가 4번째 총선 출사표를 던진 바탕은 백신으로 얻은 정치적 자신감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국제적인 위상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백신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현지 컨설팅업체 레바다가 조사한 푸틴의 업무 지지도는 코로나가 잠잠하던 지난해 2월까지 69%에 이르렀다. 하지만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4·5월에는 59%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러시아가 개발한 스푸트니크 V 백신이 특수 대상자에게 접종되기 시작한 8월 반등으로 돌아서 9월에 69% 선을 회복했다.

스푸트니크 백신은 2상 임상시험이 끝나기도 전인 지난 8월 11일 러시아 보건부의 임시사용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다. 임상시험 2상 결과는 9월 4일, 3상은 12월에 각각 발표됐으니 허가부터 내주고 유효성과 안정성 검증을 뒤늦게 진행한 셈이다. 이런 비과학적인 절차의 배후에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푸틴(左), 시진핑(右)

푸틴(左), 시진핑(右)

푸틴은 백신 개발로 회복된 지지도와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장기집권이 가능해진 것을 바탕으로 2021년 권위주의 통치체계를 강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VOA는 푸틴이 올해 비판자들을 해산하고 무력화해 권위주의 통치기반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올해 신년사에서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필코 실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다.

중국에선 시노팜·시노백·칸시노 등이 백신을 개발해왔으며 시노팜 백신은 지난달 31일 중국 당국의 임시사용 승인을 받았다. 승인 전에 이미 450만 명이 백신을 맞았다고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밝혔다. 중국은 아프리카·중남미·중동 등에 백신을 다량 공급하면서 방역 외교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시 주석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일인 백신이 대선일인 11월 3일을 넘어 12월에야 개발이 끝나고 접종이 시작되면서 백신 덕을 보지 못하고 재선에 실패했다. 그를 제외한 전 세계 정치 지도자들에게 백신은 ‘절대 반지’의 위력으로 다가서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