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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와 시민주권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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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문재인 정부에서 많이 등장한 용어로는 ‘촛불시민혁명’ ‘국민(시민)주권’ ‘시민참여’ ‘시민의 힘’ ‘사람 중심’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다수의 참여’를 지향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조국 전 장관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촛불 시민의 힘 덕분에 현실화된 것”이라고 했다. 공수처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동의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집권 세력에 속한 자치단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민 주권 특별자치시 세종’ ‘새로운 대전! 시민의 힘으로!’ 등의 슬로건은 익숙하다. 허태정 대전시장도 지난 18일 온라인 시민과의 대화를 열면서 “시민 참여를 강화해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정의 핵심 가치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대전시 주민참여예산 확정을 위한 시민공청회. [연합뉴스]

대전시 주민참여예산 확정을 위한 시민공청회. [연합뉴스]

시민주권 실현을 위해 대전시가 내세우는 것으로는 ‘대전시소’가 있다. 이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비슷한 형태의 온라인 공간이다. 시민 제안에 100명이 공감하면 토론장이 열리고, 1000명이 참여하면 시장이 답한다. 대전시소가 참여의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정책을 인기투표로 정할 가능성이 있는 구조다.

대전시는 최근 오프라인 시민 참여 공간 확충 차원에서 시청 내부를 리모델링했다. 그래서 시민라운지(북 카페)·홍보관·어린이도서관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15억원을 썼다. 인테리어 공사치고는 상당한 예산이다. 이 사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시작했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시민 살림살이도 버거운 데 꼭 이런 걸 해야 하냐”는 지적이 나왔다. 시민라운지(210㎡) 등은 코로나19 여파로 언제 문을 열지 기약이 없다.

대전시는 내년에 집행할 주민참여예산 규모도 올해 100억원에서 150억원으로 늘렸다. 좀 더 많은 시민에게 참여 기회를 주자는 취지다. 시는 이 돈으로 시민 제안과 온라인 투표를 거쳐 총 216건의 사업을 결정했다. 가로등 같은 조명이나 감시 카메라 설치, 보도블록 교체 같은 게 대부분이다. 이런 사업은 자치단체나 지방의회에서 늘 해오던 것이다.

지방의원들은 “주민참여예산제는 대의민주주의 핵심 기구인 지방의회 역할과 중복된다”며 불만이다. 또 일부 사업 결정 과정에 시민단체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하지만 무작정 많이 참여한다고 민주주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른바 ‘촛불시민혁명’ 이후 상황은 무분별한 다수의 참여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참여만 외치면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만 남는다. 집단으로 숨은 개인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적을 만든다. 시민주권시대는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김방현 대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