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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선희의 문화 예술 톡

86세 화가의 삶이 녹아 있는 그림 -로즈 와일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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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

연말이면 식상한 문구처럼 사용했던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2020년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인류에게 거대한 위협이 된 지금 과연 새해에는 어떤 각오와 꿈을 품어야 할까?

서울의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영국의 원로 여류 작가 로즈 와일리의 전시를 보면서 자신의 일을 그저 묵묵히 계속해나가는 것이 인생의 위대한 업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올해로 86세를 맞은 로즈 와일리는 20대에 미대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키운 후 45세가 넘어서야 다시 미술 공부를 하고 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거의 30년을 무명인 채로 자신이 사는 런던 외곽 지방인 켄트의 집 2층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다. 왁구를 하지 않은 채 바닥이나 벽에 캔버스를 붙이고 그림을 그렸기에 거대한 캔버스들이 그녀의 아틀리에에 마치 카펫 가게의 카펫 더미처럼 가득 쌓일 정도로 그녀의 그림들은 오랜 세월 소장자를 찾지 못했다.

영국 켄트 지방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로즈 와일리. [사진 Joe McGorty]

영국 켄트 지방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로즈 와일리. [사진 Joe McGorty]

70대 중반이 되어서야 영국의 미술관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그녀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는 ‘지금 영국에서 가장 핫한 신진 작가는 76세의 로즈 와일리’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대서특필하였다. 이후 전 세계 미술관들에서 그녀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하고 2018년에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문화 예술계 공로 훈장을 받게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한 듯한 와일리의 그림들은 영국 왕립학교에서 드로잉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과 대상·주제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심사숙고가 기반이 되어 탄생한 창조물들이다. “왕립학교에서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는 그 완벽함에서 멀어지기 위한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해왔다”라고 와일리는 말한다. 갤러리스트로 예술 작품들을 소개하다 보면 “이런 작품 나도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무명인 채로 세상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몇십년을 포기하지 않는 고독한 창작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라고 먼저 질문해본다.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컬러들로 그려진 86세 화가의 그림에는 인생이라는 어려운 수업에서 힘들게 훈련을 겪은 노장의 노력과 삶의 상징들이 녹아있다. 또한 그 삶은 와일리에게는 성공을 생각하지 않는 자유이고 행복이었으리라.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의 방문이 매우 제한된 오늘도 와일리는 그녀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해에는 같은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는 86세의 나의 모습을 그리며 나의 자리에서 나의 일을 묵묵히 하리라고 다짐해본다.

최선희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