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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줄어드는 한국 민주주의 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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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경제EYE팀장

문병주 경제EYE팀장

국민은 일상을 멈추고 있지만 정치권은 숨 가쁘다. 빗발치게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압도적 국회의원 수를 앞세워 일사불란하게 각종 법안을 처리하는 이들은 독재 권력에 대항해 싸워온 결실을 볼 때라며 ‘민주주의의 완성’을 외쳤다. ‘독재 꿀’이라는 신선한 말도 탄생했다.

무력감을 느끼는 건 야당뿐 아니다. 기업인들을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박용만 회장은 경제 법안들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걸 지켜보면서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거면 공청회는 과연 왜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경제와 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큰 법안을 정치적 법안과 동일선상에서 시급하게 통과시키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노트북을 열며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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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정점으로 해서 진행되는 일련의 행정작용에 대한 우려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됐다.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의 적폐적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앞세운 직권남용죄(형법 123조)가 오히려 부메랑이 돼 현 정부를 향하고 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 이은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사건’이 본격적인 시작으로 읽힌다. 그러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앞장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포화를 집중하고 있다. 한데 윤 총장에 대한 징계 사유 구성 과정에서조차 직권남용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규정된 이 죄목마저 다수결의 원칙을 앞세워 개정해버릴지 모른다는 농담까지 돈다.

일각에서는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에 대항하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쓴 김지하 시인의 1975년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소환했다. 80년대와 90년대 초 대학가와 길거리에서 목 놓아 불리던 이 노래가 오히려 그 시기 독재 타도를 외치던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범여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권 1표가 대표적이다. 통과를 당론으로 했던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검찰 개혁은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민주주의 없이 검찰 개혁도 없다”고 했다.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 여부에 대해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 대통령의 말 역시 민주적 방식을 거스르지 말라는 뜻으로 읽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며 키운 한국 민주주의의 무게가 줄어들고 있다.

문병주 경제EYE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