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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석 육박하자 180도 돌변···결국 힘으로 이룬 文 ‘검찰개혁’

중앙일보

입력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야당 비토(veto·거부)권 삭제를 골자로 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날 오후 열린 임시국회 본회의 첫 안건으로 상정돼 찬성 187명, 반대 99명, 기권 1명으로 이변은 없었다.

공수처법 개정안은 국무회의 심의→대통령 재가→개정안 공포를 거쳐 즉시 시행된다. 야당 비토권이 사라진 만큼 여권 입맛에 맞는 인사가 초대 공수처장으로 지명되고, 인사청문회를 거치면 공수처는 올 연말이나 내년 초 출범한다.

법무부도 이날 오전 검사징계위원회를 열고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15일 속개되는 징계위에서 윤 총장 징계가 이뤄지면, 여권이 추진해 온 이른바 ‘검찰 개혁’은 제도적 준비에 이어 인적 청산까지 마무리될 전망이다.

文 오랜 숙제 ‘검찰개혁’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2003년 3월 9일 청와대 민정수석 재직 당시 모습.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에 배석해 이를 끝까지 직접 지켜보았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2003년 3월 9일 청와대 민정수석 재직 당시 모습.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에 배석해 이를 끝까지 직접 지켜보았다. 중앙포토

‘검찰개혁’은 문 대통령 입장에선 10년도 넘은 숙제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누구보다 검찰의 생리를 절감했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 문 대통령은 “이 사건에서 검찰은 최소한의 윤리도 지키지 않았다”며 “본질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정치권력과 검찰의 복수극이었다”(『검찰을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2011년 쓴 『문재인의 운명』에선 “지금 검찰개혁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며 “지나치게 비대해진 검찰권력, 지나치게 정치화된 검찰권력, 통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검찰개혁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검찰개혁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에 따라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검찰개혁도 화두가 됐다. 다만 100대 국정과제에 '권력기관 개혁’으로 명시되는 등 단지 검찰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권력기관 개편과 맞물린 형태였다. 검찰의 독점된 수사·기소권을 분리하면서 경찰·국정원 등과의 협력·견제 등 제도적, 시스템적 개선으로 관측됐다. 특히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가 돼야 한다.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지난해 '조국 사태' 등 윤석열 검찰의 수사가 권력 핵심부로 향하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서초동 앞에 촛불을 들고 모여 “윤석열 사퇴”를 외쳤고, 여당은 검찰을 매일 성토했다. ‘검찰개혁’이 ‘검찰 죽이기’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지난해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검찰 개혁의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준 뒤 환담을 하러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를 당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준 뒤 환담을 하러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를 당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특히 민주당이 4월 총선에서 180석에 육박하는 거대여당으로 탈바꿈하면서 검찰을 향한 압박은 더욱 노골화됐다.

①프레임(frame) 전쟁= 이른바 '검찰개혁'은 검찰 비리 의혹이 하나씩 불거지면서 공론화됐다. 숱한 폭로와 증언으로 ‘검찰 게이트’를 방불케 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위증을 강요했다는 의혹은 고(故)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동료 수감자의 전언이 출발점이었다. 현직 기자와 검사장이 연루돼 '검언유착'이란 말까지 만들어진 채널A 의혹은 이철 전 밸류인베스트먼트코리아(VIK) 대표(징역수감)의 대리인을 자처한 ‘제보자 X’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라임 사태’의 주범 김봉현 전 회장(구속)은 옥중 서신을 통해 검찰의 ‘짜 맞추기 수사’ 의혹을 폭로했다.

이때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직접 수사지휘권을 발동하곤 했고, 여권 인사들은 “충격적"이라고 거들면서 의혹을 기정사실인 양했다.

하지만 여태 검찰 비리 의혹은 ‘검사 술 접대’ 의혹을 제외하곤 대부분 거짓으로 판명 나거나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는 상태다. 특히 김봉현 폭로 등과 관련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일국의 법무부가 검찰을 범인으로 매도하고 범법자를 의인으로 추앙한다”며 “그들의 프레임은 대안 세계를 창조하는 ‘제작의 틀’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검찰개혁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검찰개혁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②민주적 통제= 여권이 검찰개혁을 강조하면서 꺼내 든 논거는 ‘선출된 권력의 민주적 통제’였다. 검찰은 일개 외청(外廳)이니, 국민이 선출한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지휘를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민주적 통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면서, ‘윤석열 찍어내기’ 논란이 있던 추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도 정당화됐다. 추 장관의 수사지휘에 대해 검찰 내부 반발이 거세지자, 김태년 원내대표는 지난달 2일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위임을 받아 임명직 공직을 통제하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선출된 권력’이란 논리 속에 검찰 수사에 대한 압박도 거세졌다. 민주당은 월성 1호기 수사와 관련해 지난 2일 “정부의 정당한 정책에 대한 명백한 정치수사이자 검찰권 남용”(허영 대변인)이라고 비판했다.

③요식 입법= ‘검찰개혁’이란 명분 앞에 국회 심의·의결 과정은 요식행위로 전락했다. 이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포함한 전 상임위 위원장 자리를 독식한 민주당은 안건 기습 상정과 기립 표결 등으로 공수처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문 대통령의 생각 그대로 진행된 것”이란 말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과거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을 “법사위원장을 야당에 넘겨준 국회 원 구성 협상의 잘못이 있었다.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 우리 쪽의 '양심'도 개혁입법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문재인의 운명』)고 했다.

개혁은 퇴색, 대립은 강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공수처법이 상전된 9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며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라는 검찰 비판 책을 가방에서 꺼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공수처법이 상전된 9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며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라는 검찰 비판 책을 가방에서 꺼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부·여당이 '검찰개혁' 속도를 냈지만,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했고 명분은 약해졌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11월 30일~지난 2일 조사한 결과,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되는 등 당초 취지와 달라진 것 같다’는 의견이 55%,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당초 취지에 맞게 진행되는 것 같다’는 의견이 28%로 나타났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진보층 이탈도 동시에 이뤄졌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처음으로 40% 아래인 37.4%를 기록한 리얼미터·TBS 여론조사(11월 30일~12월 2일)에서 자신의 이념 성향을 진보라고 답한 이들의 지지율은 72.0%→64.2%로 가장 많이 하락했다.

이미 전문가 사이에선 “곧 출범할 공수처가 문 대통령이 당초 강조한 검찰개혁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는 진단이 많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헌법학)는 “진정한 검찰개혁은 기본권 친화적인 검찰이 되는 것이지만, 헌법에 근거가 없는 공수처에 야당 비토권까지 없애는 개정을 강행하면서 정권의 호위기관을 만든 꼴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윤 총장에 대한 징계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진영 갈등이 당분간 계속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수처법 개정 강행으로 여당은 과정은 포기하고 결과만 가져오는 개혁,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를 선택했다”며 “양 진영 대립과 갈등이 더욱 격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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