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하버드대보다 93년 앞선 '사립대학' 소수서원

중앙일보

입력 2020.12.10 09: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89)

경북 영주 소수서원은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730년 전 이 땅에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의 뜻을 따라 선비를 양성하고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9곳 서원 중 하나다. 다시 주목받고 있는 소수서원의 숨은 코드를 소개한다.

하늘에서 본 소수서원 전경. 맨 앞이 강학당이며 맨 뒤가 소수중학교가 있었던 충효교육관. [사진 소수박물관]

하늘에서 본 소수서원 전경. 맨 앞이 강학당이며 맨 뒤가 소수중학교가 있었던 충효교육관. [사진 소수박물관]

소수중학교의 모태 
1952년 지역 유림은 신교육 물결이 일자 소수서원에 사립 소수중학교를 설립한다. 서원의 교육 정신을 잇고 실천하자는 뜻에서다. 중학교는 지금의 충효교육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교실 10칸에 그 앞은 운동장. 소수서원의 류준희 현 도감이 여기서 공부했고 1965년 졸업했다. 당시 재학생은 400명에 가까웠다. 서원 가운데 서재이자 기숙 공간인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가 있다. 소수중학교 시절 이곳은 교장실과 교무실로 이용되었다. 1542년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소수서원은 400년이 지나 이렇게 신식 교육까지 품어 안은 것이다. 소수중학교는 이후 베이비붐으로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순흥면 소재지로 옮겨졌다.

강학당 내부. 벽면 가운데 명종 임금이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 사공정길 학예사]

강학당 내부. 벽면 가운데 명종 임금이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사진 사공정길 학예사]

서원 이름 ‘소수’의 뜻

서원의 중심 건물은 강학당이다.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공간이다. 강학당 입구에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세붕이 1543년 서원 창건 때 붙인 이름이다. 흰 구름이 항상 서원 옆 죽계 골짜기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공립인 성균관과 다른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1636년 미국에 설립된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 앞선다. 강학당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에 또 하나의 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다. 서체가 단정하다.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당시 서원의 진흥을 위해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렸다. 사립대학 서원을 국가가 공인해주고,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1550년 명종 임금은 서원의 새 이름을 짓고 직접 글씨를 쓴다. ‘소수(紹修)’는 자신의 내면을 닦아 유학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백운동서원에 마침내 소수서원이란 편액과 사서오경 등 서책, 노비가 내려온다.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과정이다.

죽계천 ‘敬(경)’자 바위. 주세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소수박물관]

죽계천 ‘敬(경)’자 바위. 주세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소수박물관]

붉은색 ‘敬’자에 숨은 코드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 바위에는 붉은색 ‘敬(경)’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뒤 성리학의 핵심인 ‘경’을 직접 쓰고 새긴 것이다. 본래는 이 글씨가 붉은색이 아니었다고 한다. ‘경’자가 붉은색이 된 데는 슬픈 사연이 전한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은 조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다. 그해 10월 거사는 관노의 밀고로 탄로 난다. 실패의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었다. 고을 전체가 참화를 당한다.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당시 시신 일부는 죽계천에 수장되고, 그 일이 있은 이후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밤만 되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이 혼령을 달래려고 죽계천 ‘경’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 들여 제사를 지내자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것이다.

국보 제111호 안향의 초상. [사진 소수박물관]

국보 제111호 안향의 초상. [사진 소수박물관]

대장장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평등교육

퇴계는 풍기군수 시절 소수서원에서 제자를 직접 가르쳤다. 그 시절 대장장이 배순이 서원에 그릇을 공납하러 왔다가 자신도 배우고 싶어 선 채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퇴계는 그 모습을 보고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여 글을 가르친다. 배순은 훗날 퇴계의 문도록에도 이름이 올랐다. 퇴계가 신분을 뛰어넘어 평등교육을 실천한 도량이 소수서원이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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