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86)
9월 21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등기 우편물이 도착했다. 열어 보니 한지로 싼 겉봉에 ‘도산서원 재유사 망기(陶山書院 齋有司 望記)’라고 한자로 가지런히 적혀 있다. 재유사로 활동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망기를 폈다. 한지 전지에 세로로 대자 넉 줄을 썼다. ‘도산서원 재유사/망(望)/유학(幼學) 송의호/경자 8월’에 도산서원 직인을 찍었다.
안내문이 동봉되었다. 이번 첫 행공(行公)은 음력 8월 30일 오후 3시 30분까지 박약재(博約齋)로 입재해 달라고 되어 있다. 복장은 바지저고리 두루마기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고 도산서원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마지막이 특별하다. “입재하기 3일 전부터 재계 기간입니다. 근신하고 특히 문상 등 궂은일은 피하고 심신이 청결한 상태로 입재하길 바랍니다.”
![도산서원이 보내온 재유사 망기. [사진 송의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10/29/55298922-140a-417b-b17d-c0e36843e74c.jpg)
도산서원이 보내온 재유사 망기. [사진 송의호]
재유사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역할도 자세히 모르면서 덜렁 그러겠다고 답했다. 5년여에 걸쳐 글을 쓰느라 선비의 삶을 돌아본 것이 영향을 미쳤다.
10월 16일 예정된 입재일이다. 2, 3교시 강의를 마치고 대구에서 안동으로 향했다. 도산서원 관리사무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두루마기까지는 고름 매는 것까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입는 도포는 마지막 띠를 두르는 것이 헷갈렸다. 일단 질끈 묶었다. 도포를 입는 몇 사람이 더 보였다. 서둘러 도산서원 진도문으로 올라갔다. 외부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전교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동재가 박약재다. 평소 밖에서만 보던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행공을 진행할 별유사 두 사람(이태원‧이동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신임 재유사는 모두 5명이다. 모두 도착해 맞절을 하자 별유사가 차례로 소개했다. 재유사 5명은 68세부터 아래로 내려와 내가 가장 나이가 적었다.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을 뵙는 상덕사(尙德祠) 알묘에 나섰다. 첫 인사 의식이다. 상덕사 앞뜰에서 모두 두 번 절했다.
![신임 재유사들이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알묘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10/29/56b90b8e-3987-4306-9d8b-1578dc50f3b3.jpg)
신임 재유사들이 도산서원 상덕사에서 알묘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돌아와 재유사의 역할과 첫 일정을 설명 들었다. “도산서원 모든 공문은 재유사의 이름으로 나갑니다. 이번 재유사는 내년 춘계 향사까지 6개월간 행공합니다. 음력 그믐과 열나흘 일몰 전 입재해 재계(齋戒) 강독(講讀)을 하고 다음 날 해 뜨는 시각에 향알(香謁, 향을 피우고 인사를 드림)한 뒤 돌아갑니다.”
알고 보니 이 전통은 1575년 도산서원 창건 이래 445년 동안 이어졌다. 곧이어 준비한 강독 교재가 배부되었다. 『성독(聲讀)자료집』 『도산잡영』 『잠명제훈(箴銘諸訓)』 등에 의례의 차례를 적은 ‘홀기(笏記)’와 ‘원규(院規)’ ‘퇴계선생자명(自銘)’까지 한 짐이다. 재계 강독을 이끌어가는 권갑현 박사가 자리에 앉았다. 도산서원 원규부터 대부분 한자로 빼곡히 적힌 교재를 넘기면서 바로 첫날 강독이 시작됐다. 템포는 빨랐다. 대부분 이런 공부를 얼마간 한 사람이었다. 문답을 빼고는 쉴 틈 없이 뜻을 새기고 운을 넣어 함께 성독했다. 향알에 앞서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공부하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재계하는 과정이다.
![도산서원 박약재에서 재유사들이 재계 강독하는 모습. [사진 송의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10/29/69ccd9a9-7fb0-4df5-9d7d-27f4eb58a38d.jpg)
도산서원 박약재에서 재유사들이 재계 강독하는 모습. [사진 송의호]
필자는 모르는 글자가 나올 때마다 음을 적으며 따라갔다. 두 시간 이상을 모두 꼼짝없이 정좌해 듣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릎이 아파 염치불구하고 다리를 폈다가 구부리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저녁 시간이 됐다. 전교당과 상고직사를 지나 쪽문을 나가니 산등성이로 길이 나 있다. 굽이를 돌자 산기슭에 관리사가 있었다. 아주머니가 저녁상을 차려 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퇴계 선생이 즐겼던 소박한 나물 반찬과 진배없다. 맛있게 먹었다. 돌아와 30분 정도 양치질 등을 한 뒤 다시 재계 강독이 시작되었다. 강행군이다. 그런 중에 최근 선생의 ‘도산십이곡’에 곡을 붙인 노래를 악보를 보며 같이 불렀다. 앞으로 선생 관련 모든 행사에 부르게 된다고 한다.
밤 10시. “지금부터는 야화 시간입니다.” 이태원 별유사의 말에 모두 다소간 긴장이 풀렸다. 마침내 오늘 재계 강독이 끝나고 뒤풀이 시간이 된 것이다. 안동소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어렸을 적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권갑현 박사는 ‘도산십이곡’을 다른 유명 곡에 실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첫날 일정이 끝났다. 방을 정리하고 이불을 폈다. 베개는 목침이다. 박약재 작은 방에 네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보일러가 설치돼 산속이지만 방안은 춥지 않았다. “내일은 아침 5시에 일과가 시작됩니다.” 자정. 소등을 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이쪽저쪽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이루기 어려워 필자는 한참을 뒤척였다.
새벽녘에 화장실을 들르느라 전교당 앞뜰로 나갔다. 도산서원의 밤 풍경은 처음이다. 사방은 고요하고 어둠이 짙게 내렸다. 도산서원에서 445년간 이어진 재계 강독에 참가하고 잠을 자게 되다니! 새로운 세계다. 강독을 하면서 평소 어렵게 여겨지던 유학과 의례 등을 빠른 속도로 새겼다. 어렸을 적 조부께서 새벽녘에 경전을 암송하던 게 떠올랐다. 집안 선조가 도산서당 곳곳을 시로 남긴 것도 그 뜻이 어렴풋해졌다. 도산서원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박약재로 들어갔다.
![신임 재유사들이 퇴계종택을 방문해 이근필(가운데) 종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종손을 바라보고 왼쪽이 필자. [사진 이태원 별유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10/29/f1fea5a3-05a4-48dc-b2e6-1e232325621b.jpg)
신임 재유사들이 퇴계종택을 방문해 이근필(가운데) 종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종손을 바라보고 왼쪽이 필자. [사진 이태원 별유사]
오전 5시 어김없이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의관을 정제했다. 마침내 향알 의식이 있는 초하루다. 5시 30분 다시 재계 강독을 시작했다. 어제보다 강도가 더 높아졌다. 원규를 읽고 퇴계 선생의 자명을 새긴 뒤 『성학십도』의 태극도설과 경재잠, 숙흥야매잠을 두 차례씩 성독했다. 선생을 알묘하기 전 재유사로 몸과 마음의 공력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전교당에서 아침 인사를 나눈 뒤 해뜨기 직전 상덕사로 올라갔다. “음과 양이 바뀌는 시각에 예를 올립니다.”
상덕사 안으로 들어갔다. 별유사의 안내로 나는 향로를 내리는 일(봉로)을 맡았다. 재유사 중 연장자가 향을 피웠다. 모두 앞뜰로 나와 재배했다. 다시 상덕사로 들어가 위패를 연 뒤 상읍을 했다. 향알은 선생의 위패가 보름 사이 별일이 없는지를 살피는 의식이다. 종향된 월천조공(月川趙公) 위패에도 예를 표했다. 상덕사를 나와 사당을 한 바퀴 돌며 건물의 이상 유무도 살폈다. 마침내 재유사의 향알이 끝났다. 별유사가 여비 봉투를 하나씩 주었다. 공부하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여비까지. 감사할 뿐이다. 나중에 펴 보니 퇴계 선생이 그려진 1000원짜리 신권이 가지런히 들어 있다. 아침을 먹고 우리의 첫 행공은 끝이 났다. 안동호 쪽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날이 밝아왔다. 하루가 시작된다.
오전 9시 퇴계종택을 찾아 이근필 종손과 인사했다. “세상이 모두 바삐 돌아가니 옛것에 얽매이지 말고 좋은 이야기를 나눠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가 할 일일 것입니다.” 종손은 고 권오봉 교수의 일본어 박사 논문 국역 책을 한 질씩 선물로 주었다.
유학과 퇴계 선생이 남긴 학문은 도산서원 박약재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공부로 이어지고 있다. 정신문화의 논산훈련소같이.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