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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새도 없어요" 노인공동체 '은퇴농장'

중앙일보

입력

농삿일에 묻혀 살다보니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요."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홍원리의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은퇴농장'. 회갑을 넘긴 동료 노인 20명과 함께 가을걷이에 열중하고 있는 곽병부(67)씨는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서울에서 40여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임하고 이곳에서 농사일을 시작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천직 농부에 비해 손놀림부터 어색하다. 2년 전 부인을 사별하고 당뇨.우울증까지 앓던 그다.

하지만 손수 일군 텃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콩.깨 등을 수확한다는 보람, 자신이 보내준 무공해 농산물을 반길 손자.손녀들을 그려보는 기쁨, 심신이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은퇴한 노인들에게서 느껴지곤하는 외로움.무력감의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버린 듯하다.

이곳이 문을 연 것은 1995년 8월. 농장 1만5천여평과 여덟가구가 살 수 있는 콘도미니엄 형태의 10평짜리 공동주택과 단독주택 16가구(7평형 14가구, 14평형 2가구)가 들어서 있다. 현재 서울.경기.경남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할머니와 할아버지(60~86세) 21명이 생활하고 있다.

과거 직업도 교사.공무원.회사원 등 다양하다. 농장 설립 때 입주한 터줏대감부터 입주한 지 3개월밖에 안된 노인도 있다.

노인들은 각자 방.거실.욕실.싱크대가 딸린 주택을 2년 계약으로 임대(2천5백만~5천만원)해 살고 있다. 이와 함께 매달 식비.관리비 등 모두 33만원을 낸다.

"오전 6시에 일어나 계란.오리알을 거둔 뒤 농장 주변을 산책한 다음 비닐하우스에서 깻잎.오이를 따다 보면 어느 새 하루가 지나갑니다. 일거리 많지요, 밥맛 좋지요. 무력감에 빠질 틈이 없어요."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에서 30여년간 근무하다 1996년 정년퇴직하고 이곳에서 2백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는 유용규(67)씨. 일주일에 한 번은 서해안이나 인근 저수지를 찾아 취미인 낚시를 즐기고 있다는 그는 "나이 먹고 이만큼 자유스럽게 일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을 것"이라며 만족해했다.

젊은 시절 국악인 안비취씨 등과 함께 활동을 했다는 김옥희(79)할머니는 이곳에 온 지 3개월밖에 안돼 한창 농사일을 배우고 있다.

노인들이 이처럼 활력을 찾으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농장 주인 김영철(50).박영애(47)씨 부부의 독특한 농장 운영방식 덕분이다.

金씨 부부는 2년 전부터 농장 안에 12개 동의 비닐하우스를 지어 깻잎.아욱.근대.오이 등을 심었다. 이들은 노인들이 자기 능력껏 경작할 수 있을 만큼 채소밭을 무료로 빌려주었다. 노인들은 1년 동안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가꾼다.

노인들이 수확한 채소는 金씨 부부가 시장에 내다판다. 수익금의 30%는 노인들의 몫이다. 노동의 대가로 노인들은 매달 5만~40만원을 받는 셈이다. 일부 노인은 이렇게 번 돈을 꼬박꼬박 모아두었다가 주말에 농장을 찾는 손자.손녀들에게 용돈으로 준다.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는 채소는 농약을 일절 뿌리지 않은 무공해 자연식품이다. 올해 초에는 농산물품질관리소로부터 유기농산물 인증도 받았다.

金씨 부부는 비닐하우스 밖에 있는 밭도 노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들 부부가 트랙터로 밭을 갈아주면 노인들은 씨 뿌리기.김매기.잡초 뽑기 등을 한다. 밭에서 거둔 농작물은 모두 노인들 차지다.

노인들은 하루 세끼 식사를 농장 내 식당에서 해결한다. 일을 마친 저녁시간에는 마음에 맞는 노인끼리 삼삼오오 모여 소줏잔을 기울이는 것은 이곳 생활의 별미다.

노인들끼리 상조회를 만들어 농장을 떠나는 노인들을 위한 송별회나 새 식구들을 위한 환영회를 연다. 金씨 부부는 관리비 조정 등 '큰일'은 상조회를 대화 창구로 삼는다.

은퇴농장에서 8㎞쯤 떨어져 있는 광천의 5일장은 노인들이 쇼핑을 즐기는 곳이다. 노인들은 장날마다 생활필수품도 사고 왁자지껄한 시골장터의 정취를 맛보곤 한다.

매주 금요일은 덕산온천에서 목욕을 한다. 또 20㎞쯤 떨어진 서해바다를 찾아 낚시를 즐기는 노인도 많다. 2년 전 이곳에서 부인을 사별한 상조회장 장우용(79)씨는 "농사일을 하면서 집사람을 잃은 슬픔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이곳의 유일한 '노인 커플'인 송재형(76).최규만(75.여)씨 부부는 "육체와 정신을 소모하는 교직생활을 떠나 생산적인 일을 하니 사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041-633-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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