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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조차 "본인 인생 사세요"···양육비 미지급 신상공개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설득을 해도 끝까지 양육비 지급을 거절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배드페어런츠’ 사이트. 홈페이지 캡처

설득을 해도 끝까지 양육비 지급을 거절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배드페어런츠’ 사이트. 홈페이지 캡처

자녀를 둔 남녀가 이혼했다. 아이는 여성이 키우기로 했다. 그런데 상대 남성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제3자가 남성의 신상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올린 내용 중에는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도 있었다. 남성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제3자를 고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허위사실을 고의로 올린 것은 아니라며 무죄라고 판단했다.

이혼 후 자녀에게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해 온 강민서(48) 양육비해결모임 대표 얘기다.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그는 지난달 29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나는 무죄를 받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신상공개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6일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사적 감정 없다” 1심 무죄

'배드페어런츠' 강민서 대표가 지난 9월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명예훼손 사건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배드페어런츠' 강민서 대표가 지난 9월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명예훼손 사건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강 대표는 2018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홈페이지 이름은 '배드 페어런츠(bad parents·나쁜 부모)'. 남성 A씨가 20여년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며 신상정보를 공개했다가 지난해 6월 재판에 넘겨졌다. A씨에 대한 설명 중 ‘스키강사 출신이다’ ‘현재 사업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사실과 달라 문제가 됐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일부 사실이 아닌 정보를 올린 건 맞지만 피고가 허위사실이라고 인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양육비 지급 필요성을 강조했을 뿐 고소인에 대한 사적 감정도 찾아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판사조차 “자신의 인생을 살라”

양육비해결모임 관계자들이 지난 7월 30일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에서 "양육비 채무자를 감치해야 한다"며 경찰청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육비해결모임 관계자들이 지난 7월 30일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에서 "양육비 채무자를 감치해야 한다"며 경찰청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3자가, 고소당하면서까지 양육비 해결에 앞장서는 이유는 뭘까. 그는 “나 자신이 21년째 양육비 소송을 하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999년 아이가 돌이 되기 전 남편과 이혼한 강 대표는 양육비 약 2억원을 받기 위해 지금까지 28번 소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양육비로 받은 건 270만원이 전부다.

강 대표는 “양육비 청구 소송만큼 비참한 소송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 번은 판사가 재판이 끝난 뒤 ‘양육비 소송을 20년 했으니 이제부터 본인 인생을 사세요’라고 하더라. 어이가 없어서 펑펑 울었다”며 “아이 아빠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거지 저를 위해 돈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년간 22명 신상 공개…102건 해결

강 대표는 "장기간 소송을 이어가며 법정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거나 나를 대신해 전 남편에게 전화 한 통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2018년 9월부터는 양육비 미지급 분쟁에 휘말린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부모 사이를 중재해 양육비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필요하면 재판도 함께 나간다.

강 대표는 “이혼한 부부의 경우 감정의 골이 쌓여 제3자가 중재를 해 주는 게 도움이 된다. 16년 정도 양육비를 주지 않던 사람도 지난 2018년부터 이번 해 9월까지 꾸준히 연락을 드렸더니 결국 3200만원 정도 되는 양육비를 모두 줬다”고 말했다. 설득해도 끝까지 양육비 지급을 거절하는 이들은 신상을 공개한다. 이런 식으로 강 대표가 해결한 사건은 2년간 102건.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양육비 미지급 부모 22명의 신상이 올라와 있다.

강 대표는 국가가 양육비 갈등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을 공개하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심리적 압박이다. 어딘가에 내 얼굴이 있다고 하면 그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었다”며 “양육비 이행 명령을 내려도 구속력이 약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더는 재판에 휘말리지 않게 국가가 나서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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