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왜 아이돌은 지구를 지킬까” 오행까지 등장한 세계관 전쟁

중앙일보

입력

영화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에서 누나 역으로 특별출연한 설현.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에서 누나 역으로 특별출연한 설현.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FNC의 새 보이그룹 피원하모니 멤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FNC의 새 보이그룹 피원하모니 멤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1113명.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 동원한 개봉 첫 주 관객 수다. 오는 28일 데뷔를 앞둔 6인조 보이그룹 피원하모니의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가 “K팝 그룹 최초로 세계관을 장편 영화한 프로젝트”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정진영ㆍ정용화ㆍ설현ㆍ조재윤ㆍ최여진이 특별 출연하고, 정해인과 유재석이 카메오로 나서는 등 FNC 소속 연예인들이 총출동하며 힘을 보탰지만 13일까지 누적 관객 수 역시 1717명으로 저조한 수준이다.

K팝 최초 세계관 영화 개봉 ‘피원에이치’ #지구공동설 등 다양한 상상의 나래 펼쳐 #관객수는 초라해도 세계 각국서 관심 #“과한 콘셉트, 오히려 진입장벽” 지적도

하지만 정작 FNC 측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다. 당초 극장 상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영상물이 아님에도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관심을 보이면서 개봉이 결정된 것인데다, 해외에서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7일부터는 카카오TV와 일본 야후재팬에서 축약본이 공개되고, 중화권 최대 동영상 플랫폼 텐센트와 동남아 7개국서 서비스되는 Viu에서도 상영 계획을 밝혔다. FNC는 “상업영화로서 단기적인 성과를 내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세계관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어서 상징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MBTI로 캐릭터 먼저 구축, 이야기 덧대”

28일 데뷔를 앞둔 피원하모니. 앨범에 앞서 영화로 첫 선을 보였다. [사진 FNC엔터테인먼트]

28일 데뷔를 앞둔 피원하모니. 앨범에 앞서 영화로 첫 선을 보였다. [사진 FNC엔터테인먼트]

각본 및 연출을 맡은 창 감독도 이번 협업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 2002년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시작해 2008년 ‘고사: 피의 중간고사’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딘 창 감독은 2014년 ‘표적’으로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고 2017년 ‘계춘할망’으로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창 감독은 “이야기를 먼저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놓고 역으로 이야기를 쫓아가는 방식으로 일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며 “멤버별 MBTI 성격유형 검사 결과를 토대로 인터뷰를 통해 발전시켜나갔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FNC가 데뷔 전부터 세계관 구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초기부터 팬덤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다. FNC는 2007년 FT아일랜드를 시작으로 씨엔블루ㆍ엔플라잉 등 밴드형 아이돌의 활약으로 몸집을 불려 왔지만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보이그룹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초능력’을 가진 SM의 엑소(EXO)나 ‘영혼의 지도’를 탐닉 중인 빅히트의 방탄소년단(BTS) 등을 필두로 ‘소년 3부작’을 마친 플레디스의 세븐틴과 ‘네오 컬처 테크놀로지’를 표방하는 SM의 NCT까지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라서면서 회사를 대표할 만한 스타 그룹의 탄생이 더욱 절실해진 상황이다.

“세계 어느 사람이 봐도 공감할 수 있어야”

지난달 63빌딩 옥상에서 데뷔 쇼케이스를 연 보이그룹 고스트나인. [사진 마루기획]

지난달 63빌딩 옥상에서 데뷔 쇼케이스를 연 보이그룹 고스트나인. [사진 마루기획]

고스트나인의 세계관을 담은 영상 ‘시네마틱 워크’. [사진 마루기획]

고스트나인의 세계관을 담은 영상 ‘시네마틱 워크’. [사진 마루기획]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개별 작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이야기로 매끄럽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독특한 소재와 보편적 주제가 필수적이다.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아이돌 시장에서 반짝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눈길을 붙들 만큼의 특별함과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전파할 만한 메시지가 갖춰져야 하는 탓이다. ‘피원에이치’는 분노와 폭력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과거ㆍ현재ㆍ미래 등 서로 다른 차원에 흩어져 있는 소년들이 모여 희망의 별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큰 줄기를 잡았다. 창 감독은 이에 대해 “세계 어느 사람이 봐도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만듦새는 아쉽지만 코로나19가 점령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좀비물을 보는 기분도 든다.

콘셉트 선점도 더욱 치열해졌다. 지난달 데뷔한 보이그룹 고스트나인은 ‘지구공동설’을 표방한다. 9명의 소년들이 붉은 눈의 로봇을 마주한 후 지구에서 일어난 이상현상을 목격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콘셉트다. 16분 분량의 영상을 ‘시네마틱 워크’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에 공개하기도 했다. 마루기획 원근연 이사는 “K팝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게 된 데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주얼 요소의 영향도 크다”며 “배트맨이 고담 시티 곳곳에 등장하는 것처럼 고스트나인도 63빌딩 옥상에서 진행한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공연장 뿐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활용한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야기 채워가는 재미, 거대한 놀이터” 

10가지 동양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오케스트라를 뜻하는 보이그룹 TOO. [사진 n.CH엔터테인먼트]

10가지 동양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오케스트라를 뜻하는 보이그룹 TOO. [사진 n.CH엔터테인먼트]

지난 3월 데뷔한 보이그룹 TOO는 동양 철학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10가지 동양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오케스트라라는 팀명에 맞춰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목(木), 금(金), 토(土), 화(火), 수(水)를 형상화했다. n.CH엔터테인먼트 장현진 상무는 세계관을 “팬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이야기를 재생산하며 연결해 가는 거대한 놀이터”에 비유했다. 큰 주제와 콘텐트가 주어지고 나면 그 속에 숨겨진 힌트를 찾고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것은 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에 기획사들은 작가를 채용하는 등 보다 촘촘한 스토리 라인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을 피하는 편이다.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세계관에 대한 반발도 있다. 현재 제작 중인 방탄소년단 드라마는 상처투성이 소년들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는 ‘화양연화’ 시리즈가 중심이다. 2015~2016년 ‘화양연화 pt.1/ pt.2/ Young Forever’ 등 시리즈 앨범으로 시작해 2019년 웹툰 ‘화양연화 Pt.0 세이브 미’, 소설 『화양연화 더 노트 1, 2』로 이어져왔다. 랜디 서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 팬들 중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서브 컬처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공들인 서사가 보이면 호기심을 갖는 편”이라며 “하지만 모든 팬들이 관심 있게 서사를 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탄탄한 기획이 있었기에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국 조지메이슨대 이규탁 교수는 “방탄소년단의 성공으로 세계관이 K팝의 필수 요소처럼 자리잡으면서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데 과한 콘셉트는 오히려 진입장벽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