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박경수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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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박경수는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기대주 딱지를 떼고 꽃을 피웠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 향기는 깊고 진하다. [연합뉴스]

박경수는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기대주 딱지를 떼고 꽃을 피웠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 향기는 깊고 진하다. [연합뉴스]

프로야구 KT 위즈 박경수(36)는 2003년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첫 팀은 LG 트윈스. 계약금 4억3000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그만큼 기대주였다. 성남고 시절 공·수·주를 겸비한 ‘초고교급’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장타력까지 뛰어났다. 한 야구 관계자는 “박경수는 당시 ‘기본만 해도 박진만, 잘하면 이종범까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전했다.

고교 때부터 30살까지 유망주로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컸던 20대 #팀 리더로서 첫 가을야구 기대감

고교 시절 박경수는 1학년 때부터 주전이었다. 3학년 때는 추계리그 타율이 0.760이었다. 유격수 기근에 시달리던 서울 연고 구단 LG와 두산 베어스 모두 관심을 보였다. 박경수를 1차 지명한 LG가 영입 경쟁의 승자가 됐다.

그 후 11년이 흘러 박경수는 서른이 됐다. 그때도 여전히 ‘유망주’로 불렸다. 유격수 자리를 후배에게 주고 2루수로 뛰었다. 2군에서 펄펄 날다가도 1군에 오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시작해 기대감을 높이다가 이내 하락세를 탔다. 시즌 끝 무렵 갑자기 타격감을 회복해 ‘희망 고문한다’는 비아냥도 들었다. 남다른 재능, 큰 기대, 평범한 성적, 그래서 더 큰 아쉬움. 박경수의 20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014년, 박경수는 예비 자유계약선수(FA)였다. 주전 자리를 놓고 후배들과 경쟁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게 시즌을 보냈다. 입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을 경험할 기회도 얻었다. 그런데 하필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햄스트링을 다쳤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렇게 첫 가을야구가 박경수로부터 멀어졌다.

LG는 박경수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우선협상에서 잡지 않았다. 그때 신생 구단 KT가 대신 손을 내밀었다. 젊은 선수가 많은 KT는 팀의 중심을 잡아 줄 30대 베테랑 선수가 필요했다. 박경수와 4년 총액 18억2000만원에 사인했다. 그때부터 거짓말 같은 반전이 시작됐다.

KT에 온 박경수는 2015년 데뷔 후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섰다. 타율, 홈런, 타점 모두 개인 최고 성적을 냈다. 이듬해에는 선수들이 직접 뽑은 2대 주장이 됐다. 그는 “나는 한 팀의 주장을 맡을 만한 선수가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순탄치 않았던 20대 시절이 그의 자신감마저 앗아간 듯했다. 그런데 ‘주장’이라는 자리가 박경수의 마음 깊숙이 숨어있던 리더십과 책임감을 끄집어냈다. 박경수는 어느덧 KT 선수단의 진짜 리더가 됐다. 야구로도, 야구 외적으로도 그랬다.

2020년 10월 6일, 박경수는 KT 입단 6년 만에 새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부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3-4로 뒤진 6회 초 동점 솔로홈런을 터트렸다. 개인 통산 148호 홈런.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김성래 한화 이글스 코치(147개)를 넘어 KBO 리그 2루수 최다 홈런 신기록을 썼다. 이미 역대 2루수 최초로 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을 세운 뒤다.

30세까지 박경수의 통산 홈런은 43개였다. 31세부터, 그 후 6년간 100개 넘게 쳤다. 남보다 조금 느리게, 하지만 남보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성장해 결국 큰 가지를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야구 터전인 수원에서 깊게 뿌리 내렸다.

강해졌기에 오래 살아남았을까, 오래 살아남았기에 강해졌을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다. 서른여섯 베테랑은 여전히 막내 구단 KT의 한복판에서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의미가  남다르다. KT는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큼 다가섰다. 그토록 목말랐던 가을 잔치가 더는 꿈이 아니다. 조금 늦게, 하지만 활짝 야구인생을 꽃피운 박경수. 그는 아직 할 일이 많다.

배영은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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