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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1년전, 軍 후배 박정희 "혁명합시다" 돌발 제안에 깜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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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창군 주역 고 김웅수(金雄洙) 장군(1923~2018)의 회고록을 유가족(딸 김미영씨)이 찾아 중앙일보에 전했다.

창군 주역 고 김웅수 장군 회고록③

2004~2005년 작성된 회고록에는 고 백선엽 장군과 함께한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 진행 계획’, ‘화살머리고지 사수전’ 등 6·25 전쟁 일화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많다. 1일 제72주년 국군의날을 맞아 회고록의 주요 내용을 연재한다.

방대해진 軍, 정치화의 길로 들어서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가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가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김 장군은 6·25 전쟁 후 군의 정치화를 목도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회고록에 담았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 이후 5·16 군사 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배경이 된 군의 정치화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그는 전쟁 후 군이 방대해진 점을 우선 지적했다.

“한국군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투력의 급속한 발전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전쟁 전 10만 미만 병력이 전후 60만 대군이 됐다. 그리고 유엔군과 연합작전을 위해 장비도 신형화됐다. 신형화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또 방대해진 군사력과 장비를 유지하기 위한 군수지원제도,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과 행정제도가 필요했다. 이는 장교들로 하여금 군의 행정 능력이 당시 민간 능력을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김 장군은 방대해진 군이 정치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순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다.

“방대해진 군사력은 정치를 위한 표밭이자 당시로 봐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재원 조달의 소스가 돼 정치인들에게 유혹이 되며 반대로 군인들이 정치가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준 것도 사실이다. 선거 부정에 군이 개입되고, 군이 실은 부패에 앞장 서 있었다는 말도 듣게 됐다.”

1961년 3월 윤보선(가운데) 대통령이 제6군단을 방문해 당시 제6군단장이던 김웅수(왼쪽) 장군과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1961년 3월 윤보선(가운데) 대통령이 제6군단을 방문해 당시 제6군단장이던 김웅수(왼쪽) 장군과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그는 1955년 선거 과정에서 군과 경찰이 충돌할 때 헌병사령관의 발언을 듣고 군의 정치화를 본격적으로 우려했다고 기술했다.

“헌병사령관은 군은 이승만 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의견을 서슴지 않았다. 장성들 중 자유당 비밀당원이 있다 하더니 이런 자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지극히 놀랐다. 군대가 자칫하면 정치의 시녀 노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으며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군인이 될 우려가 앞섰다.”

3·15 부정선거와 군의 책임 

군의 정치화는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군이 개입했던 것이다.

“나는 군수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적 격분을 일으킨 3·15 부정선거와 이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를 겪었다. 나도 육군본부 참모부의 책임자로 송요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선거에 대해 선처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의 하나다. 군도 부정선거에 가담했고, 참모총장 스스로가 앞장선 듯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됐지만, 김 장군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해선 후한 평가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위로 부상한 학생들을 문병하기 위해 육군수도병원을 찾았던 일을 떠올리면서다.

1958년 육군 장성들이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김웅수 장군, 이 전 대통령 오른쪽이 송요찬 장군,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1958년 육군 장성들이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김웅수 장군, 이 전 대통령 오른쪽이 송요찬 장군,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그(이 전 대통령)가 4·19 후 ‘우리나라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가진 것을 나는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이 전 대통령의 병원 방문이 겉치레를 위한 정치행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해방 초창기 가난과 무지, 그리고 민주질서에 익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대한민국을 수립한 뒤 남침을 막고 한·미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노정객에 대해 공정한 역사 평가가 이뤄졌는지 의심이 간다.”

박정희의 난데없는 혁명 제안 

김 장군이 군의 정치화와 사회적 혼란에 대해 깊이 고심할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960년 1월 육군 군사참모부장으로 재직하던 김 장군은 부산에 군수기지 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차장격인 사령관으로 당시 소장 계급이던 박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

김 장군은 “송요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박 전 대통령을 육군 공병감에 임명하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박 전 대통령의 보직은 내게 맡겨달라는 뜻으로 이를 보류하고 있었다"며 "나는 그와 같이 일을 한 적은 없지만 청렴하고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한 번쯤 같이 근무하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6관구 사령관 시절인 1959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부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중앙포토]

6관구 사령관 시절인 1959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부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 장군은 박 전 대통령의 사령관 취임을 위해 동래여관에 함께 묵을 때 그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오후 내방한 박 장군은 나에게 느닷없이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대로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박 장군과는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모 잡지에는 나의 이름이 포함된 족청계(이승만 정권 초기 주류를 형성했다가 몰락한 정치 계파) 쿠데타의 가능성이 공공연히 언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박 장군이 나를 떠보고 있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군인들이 혁명을 한다고 나라가 잘된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반문했고, 그 이상 말은 진전되지 않았다.”

일각에선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 계획을 이때 김 장군에게 최초로 털어놨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김 장군은 이에 대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내게 혁명 이야기를 꺼내기 훨씬 전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도 박 전 대통령이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또 이종찬 장군은 6·25 전쟁 중 육군참모총장직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장에서 박 전 대통령의 혁명 건의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혁명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5·16이 일어난 1961년 당일 김 장군은 야전군사령부 산하 사단 대항 운동시합이 예정돼있어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과 원주에 모여있었다. 김 장군은 당시 6군단장이었다. 이날 새벽 4시 박 전 대통령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군사령관실에 소집됐던 때를 김 장군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1946년 통위부(국방부 전신) 시절 김웅수(왼쪽) 장군이 그의 창군 동기이자 군사영어학교 동기인 강영훈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88년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장군은 김웅수 장군의 매제이기도 하다. [김웅수 장군 유가족 제공]

1946년 통위부(국방부 전신) 시절 김웅수(왼쪽) 장군이 그의 창군 동기이자 군사영어학교 동기인 강영훈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88년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장군은 김웅수 장군의 매제이기도 하다. [김웅수 장군 유가족 제공]

“박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에 6군단 포병이 야외연습을 빙자해 서울 진입에 성공, 육군본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군사령관 입에서 발표됐다. 지휘관들은 놀랐으며 박 장군의 좌익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공산 쿠데타가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됐다.

나는 6군단 포병이 관련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임감보다는 군단장으로서 어쩌면 이리도 정보를 못 갖고 있었는지 한심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과거 작전국장 시절부터 군인 중에 정권을 농단하려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고 이를 막지 못할 때는 나의 군인 생명이 실패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쿠데타 계획에 가담하지 않은 김 장군은 1961년 5·16 쿠데타 후 군에서 예편된 뒤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1년 가까이 복역했다. 이후 5·16 1주기 형 집행 면제로 출감한 그는 미 국무부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72년 워싱턴 D.C. 가톨릭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학교에서 1993년까지 교수 생활을 했다. 1972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유신반대시위'의 총지휘를 수락하면서 유학의 길이 결과적으로 망명의 길이 돼버렸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 5·16을 반대해왔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며 "다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5·16을 주도한 사람이나 반대한 자들 각기 나름대로 국가관과 철학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며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걷기는 힘들 뿐 아니라 단기적으로는 외로운 길이겠으나 긴 눈으로는 외롭지 않은 길이다. 그것은 소망과 인내를 주며 고귀한 위로가 된다”고 적었다.

2012년 2월 한자리에 모인 창군 주역들. 왼쪽부터 백선엽, 김계원, 황헌친, 김종면, 김웅수, 강영훈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2012년 2월 한자리에 모인 창군 주역들. 왼쪽부터 백선엽, 김계원, 황헌친, 김종면, 김웅수, 강영훈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김웅수 장군은
1923년 외가인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독립지사였던 조부를 따라 만주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1945년 귀국해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뒤 1946년 졸업 후 참위(당시 소위 계급)로 임관했다. 이때 국군조직법 통과를 위한 작업에 관여하는 등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지명으로 육군 제2사단장이 돼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 개편위원장을 지냈다. 6군단장으로 있던 1961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창군 동기이자 매제인 고 강영훈 전 국무총리와 함께 투옥됐다.

이후 형 집행면제 판결을 받고 풀려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 D.C. 카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8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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