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칼을 쥔 중년 여성은 피 묻은 도마를 보며 넋을 놓고 있다. 생각 없이 잘라 낸 생선 대가리에서 광주항쟁 당시 실종된 아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1세대 여성주의 사진작가 박영숙의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은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 중 하나다. 미쳐서야 비로소 여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역사 속 무수한 한국 여성의 자화상이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의 ‘댄싱 퀸’전(10월11일까지)은 8인의 아시아 작가들과 함께, 30대로부터 70대를 아우르는 20인의 한국 여성작가들의 사진·회화·설치작업을 소개하고 있는데,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여성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앞 세대와 구별된다.
니키 리(이승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스트립 쇼걸, 레즈비언, 펑크족과 3, 4개월씩 동고동락하며 이질적 환경 속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냅 사진으로 기록한다. 출품된 ‘배역’ 시리즈는 상이한 계층의 남성들과 데이트 중인 자신의 섬세한 표정 변화와 동작을 클로즈업한 작품으로, 여성의 정체성이란 남녀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닌 사회적 관계에 의해 유동적으로 규정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1984년에 태어난 좌혜선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 노동의 잔혹함을 목탄으로 표현해 왔다. ‘냉장고, 여자’에는 나체로 몸을 숙이고 보물 상자 속 보석을 캐듯 냉장고를 뒤지는 여성의 뒷모습이 묘사됐다. 그녀의 뒤틀린 어깨뼈와 기형적으로 발달된 팔에는 성별을 넘어서 ‘끼니의 숙명’을 짊어진 ‘노동하는 인간’의 고통이 깃들어 있다.
전시장에는 또한 여성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작품들도 소개됐다.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사회적 사건들도 작품 속에서는 개인의 기억과 경험으로 환치되어 재배열되며(김아영), 엄청난 공력의 포토 콜라주로 구현된 현실과 비현실 사이 시공간에는 젠더로서의 여성이 아닌, 시대를 살아가며 상처 입은 실존적 ‘개인’(원성원)이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여성은 남성의 대립 항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은 웅변과 선언만이 아닌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신진 작가들의 다원화 된 경향을 페미니즘 운동의 긍정적인 열매로, 혹자는 후퇴로 평가하기도 한다. ‘댄싱 퀸’전은 현재 한국 페미니즘 미술이 처한 역동성과 혼돈을 함께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페미니즘의 잣대를 여성 작가들에게 절대적 기준으로 들이대는 것은 이들에게 이 중의 폭압을 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궁극으로 바라는 세상은 그 어떤 경계도 편견도 사라진, 페미니즘이 필요치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