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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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정철 카피라이터

피로의 끝. 갈등의 끝. 압박의 끝. 전쟁의 끝. 이것이 우리가 내리는 집의 정의다. 그러나 같은 집에 사는 누군가는 정반대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피로의 시작. 갈등의 시작. 압박의 시작. 전쟁의 시작.

『사람사전』은 ‘집’을 이렇게 풀었다. 누군가에겐 집이 재즈이고 또 누군가에겐 헤비메탈이다. 그런데 코로나는 모두에게 집을 강요한다.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집에 콕 박혀 있어야 한다. 답답함을 호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자, 오늘부터 여행을 하는 거다. 여행이라니.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 하하, 팔 걷어붙일 것 없다. 집을 여행하자는 뜻이니까.

사람사전 9/2

사람사전 9/2

우리는 모른다. 딸아이 책상에 어떤 책이 놓여 있는지. 아들 방 벽에 누구의 사진이 붙어 있는지. 그들 방을 여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모른다. 아내 옷장에 어떤 색깔 옷이 걸려 있는지. 남편이 들고 다니는 가방 지퍼가 언제 고장 났는지. 서로의 공간을 여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내 집에서 나랑 함께 산다. 거실엔 소파, 텔레비전, 리모컨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베란다 화분이 어떤 꽃을 보듬고 있는지도 확인하자. 내 방 서랍도 여행하자. 그곳엔 오래전 넣어둔 지폐 몇 장이 주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집을 여행할 기회를 줬다. 가까운 곳일수록 소홀한, 가까운 사람일수록 무심한 우리에게 잠시 멈춰 생각할 기회를 줬다.

정철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