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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한 삶 인정하는게 어른" 항암치료 뒤 복귀한 허지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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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씨를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점 '북파크'에서 만났다. 장진영 기자

새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씨를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점 '북파크'에서 만났다. 장진영 기자

 2018년 악성림프종 판정 후 지난해 항암치료를 마치고 복귀한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41)이 새 에세이집 『살고 싶다는 농담』(웅진지식하우스)을 펴냈다.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 『나의 친애하는 적』에 이어 4년만의 에세이집이다. 책이 출간된 12일 서울 용산구 서점에서 그를 만났다.

새 에세이집『살고 싶다는 농담』출간

“지금은 매우 건강합니다. 운동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가고 있어요.”
쾌활하게 인사하는 그에게 책의 제목부터 물었다. 살고 싶다는 말. 그걸 농담이라 할 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처음엔 진짜 농담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되게 아팠을 때 간호선생님을 계속 부르기가 미안해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했거든요. 다음에 책 내면 (제목을) ‘살려주세요’ 해야겠다고 농담했는데…. (지금 제목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 다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뭔가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반어가 아닐까 싶어요.”

"두가지만 기억해주길. 살아라, 같이 살아라" 

허지웅씨가 새 에세이집 『살고 싶다는 농담』을 손에 들어보였다. 장진영 기자

허지웅씨가 새 에세이집 『살고 싶다는 농담』을 손에 들어보였다. 장진영 기자

책엔 올해 초부터 써내려간 에세이 25편을 실었다. 암투병 초기 스스로 죽음 직전까지 걸어들어갔던 ‘그날밤’의 고백부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는 다짐,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주고팠던 위로까지 솔직한 마음을 새겼다. 올 상반기 운영했던 고민 상담 유튜브 ‘허지웅답기’ 속 사연도 더했다.

“독자들이 두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살아라, 같이 살아라.”

책에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 문장이 이 책의 동기다. 물리적인 한계가 있잖나. (암이) 재발률이 꽤 높다. 처음 책을 시작할 때 마음이 되게 시급했다. 제가 책에 ‘그날밤’이라고 표현한 힘들었던 순간에, ‘그 밤에 먹히지 않고’ 지나쳐내면서 아, 이렇게 막다른 길에 몰린 다른 사람에게 해줄 얘기가 있는데 이걸 다 못 털어낼까봐, 시간이 부족할까봐 서둘러 썼다.”

재발하면 치료 안 받겠다 한 이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도 했는데.

“항암 해본 모든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이 무엇을 가장 크게 바꾸나.  

“삶을 바라보는 태도. 태어났으니까 억지로 사는 것 말고 힘들어죽겠는데 하루하루 빨리 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말고 내 삶을 내 의지에 따라서 살아나간다는 감각. 100명의 독자 중 단 한 명이라도 이 글을 통해서 그 감각을 익히고 살아간다면 저자로선 다 이뤘다.”

그는 “정말 살고 싶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게 뭔지 알겠더라”고 했다. “더는 살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건 살고 싶다는 전제가 없다면 불가능한 명제”라면서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재수가 없지, 난 망했다, 망했다, 하다가 점점 더 심해져서 가게 되는 어떤 데가 있다. 거기 가지 말아라. (내가) 거기 갔다가 운 좋게 지나쳐보고 나니까, 삶에 늘 고통‧불행‧아픔은 동반될 수밖에 없고 앞으로 계속 그럴 텐데 적어도 거기 직전까지 가서 한발만 더 나가지 않으면 지금 그 정도의 세기로 너를 두들겨 패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약속하고 싶었다”고 했다.

“원래 독자한테 약속 안 하거든요. 근데 이건 약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그 이후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 감각을 기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었죠.”

불행이란 설국열차 밖의 눈 같은 것 

서울 용산구 서점 북파크 테라스에 선 허지웅 작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그는 요즘 더글러스 머리의 사회 비평서『유럽의 죽음』을 읽고 있다고 귀띔했다. 장진영 기자

서울 용산구 서점 북파크 테라스에 선 허지웅 작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그는 요즘 더글러스 머리의 사회 비평서『유럽의 죽음』을 읽고 있다고 귀띔했다. 장진영 기자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 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절망이 여러분을 휘두르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가 몸소 겪고 써내려간 문장들은 굳어진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이는 바람 같다. 영화 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썰전’ ‘마녀사냥’ ‘SNL코리아’ ‘미운 우리 새끼’ 등 방송을 거치며 정치‧사회부터 영화‧연애까지 돌직구 비판도 거침없던 시절과는 어조가 다르다.

어릴 적 뜨거웠던 그것, 포기하니 좋아졌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없던 지혜가 생기는 건 없고요….” 가만히 웃던 그가 “아파서가 아니라, 나이 들면서 포기한 게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땐 뜨거웠다. 글이든, 방송이든, 내가 어떤 종류의 ‘톤앤매너’를 고수하면 거대담론을 건드려서 개별의 삶을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못 바꾸더라. 그걸 받아들이고부터 그렇게 유난스럽게 안 산다. 체념하기보다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주변에 영향을 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시간과 여력을 쏟을 수 있어서 훨씬 좋아졌다”고 하면서다.

혼자 고고하게 버텨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 에세이집에서 "함께 사는 삶"을 강조한 허지웅 작가는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의견, 다른 종류의 사람이 뭔가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단계를 넘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각자가 만든 틀안에 다들 갇혀 산다. 그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비극의 시작점"이라고 봤다. 장진영 기자

이번 에세이집에서 "함께 사는 삶"을 강조한 허지웅 작가는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의견, 다른 종류의 사람이 뭔가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단계를 넘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각자가 만든 틀안에 다들 갇혀 산다. 그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비극의 시작점"이라고 봤다. 장진영 기자

“옛날엔 남한테 피해 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요. 산다는 건 구질구질한 거고 서로 피해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 어른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 책 전체 주제죠. 더불어 사는 것.”

그는 “살려면 버텨야 하는데 예전엔 혼자 고고하게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더는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공감과 이해,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이 요즘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과거 ‘기자 허지웅’이 지금의 자신을 인터뷰한다면 어떨까. “첫 질문은 당연히 제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걸 염두에 두고 ‘행복하냐’고 물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행복하거든요.”

"몇 밤 더 버티면 그 영화 극장서 보겠구나 했죠"

그가 가만히 말을 이었다. “행복도 너무 갈구하면 불행이랑 똑같은 것 같아요. 불행을 인생에서 교통사고처럼 맞닥뜨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다 정작 불행이 닥치면 잘 대처를 못 하죠. 행복도 똑같아요. 너무 찾아다니면 당연히 행복해야 할 일에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요즘은 뭘 할 때 가장 즐겁나.  

“최근에 하는 게임은 너무 잘 만들어서 야, 이거 못 하고 죽을 뻔했네, 그런다. 병원에 있을 때도 몇 밤 더 버티면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겠구나, 하곤 했다. 아, 오늘 ‘테넷’ 예매 성공했다. 드디어 극장에서 본다. 행복해 죽을 것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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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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