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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대폭발 '후폭풍'… 인재 가능성에 "충격이 분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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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대규모 폭발 참사를 겪은 레바논 시민들이 정부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폭발을 일으킨 질산암모늄이 베이루트 항만 창고에 수년간 방치돼 있었던 데다 정부 관료들이 이를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다. 유례없는 참사가 인재(人災)였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레바논 국민의 충격이 분노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했다.     

질산암모늄 알고도 방치 정황 드러나 #"폭발 당일 창고 수리" 증언도 #레바논 정부 항만 관리자들 가택 연금 #WSJ "붕괴 직전의 레바논, 자유낙하할 것"

레바논 시민들이 베이루트 항구에서 발생한 폭발 참사의 피해자를 애도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레바논 시민들이 베이루트 항구에서 발생한 폭발 참사의 피해자를 애도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폭발 참사 직후 “책임자들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민심 다독이기에 나섰다. 레바논 당국도 곧장 베이루트항 직원들을 가택연금했다.    

하지만 당장 '꼬리 자르기'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한 시민은 “이번 참사에 책임을 져야 할 첫 번째 인물은 바로 하산 디아브 총리와 장관들”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그들의 태만이 국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분노했다. 참사 다음 날부터 소셜미디어(SNS) 상에선 책임자를 향해 "교수형에 처하자"란 뜻의 아랍어 해시태그가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베이루트 폭발 참사에 대해 “레바논 국민들에게 1975년~1990년 발생한 내전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사건”이라고 했다.   

4일 발생한 대규모 폭발로 초토화된 레바논 베이루트항. [EPA=연합뉴스]

4일 발생한 대규모 폭발로 초토화된 레바논 베이루트항. [EPA=연합뉴스]


5일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레바논 고위 당국자들이 6년 전부터 질산암모늄이 베이루트항 창고에서 저장돼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레바논 당국이 “보관된 질산암모늄이 끔찍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를 수차례 받고도 이를 무시한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BBC 등에 따르면 베이루트항 책임자와 통관 담당자는 법원에 수차례 항구의 안전을 위해 질산암모늄을 수출하거나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법원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더욱이 폭발 참사 6개월 전에는 현장 조사팀이 “창고의 폭발물이 제거되지 않으면 베이루트 전체가 폭발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고위 관료가 이전 정부와 항구 관리자들을 탓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라오울네메 레바논 경제부 장관은 “무능과 매우 부실한 관리가 문제였다”면서도 “관리자들에 많은 책임이 있고, 이전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하산 디아브 총리는 전임인 사드 하리리 총리가 반정부 시위 속에 사퇴한 후 지난 1월 취임했다.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 시청 벽면에 레바논 국기가 불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최근까지도 무력 충돌을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대규모 참사에 애도를 표시하고 나섰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 시청 벽면에 레바논 국기가 불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최근까지도 무력 충돌을 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대규모 참사에 애도를 표시하고 나섰다. [AFP=연합뉴스]


4일 베이루트항에서 발생한 폭발 참사로 지금까지 135명이 숨지고, 5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발 잔해와 바닷속에서 사망자와 생존자들을 찾는 수색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인명 피해는 늘어날 수 있다. 레바논 당국은 베이루트 항구에 6년간 보관돼 있던 2750t의 질산암모늄이 발화하면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발화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이번 참사의 책임 규명에 착수했다. "2014년 6월 이후 질산암모늄 문제를 다루고 이에 대한 서류를 작성한 모든 항구 직원"을 대상으로 가택연금 조치를 내렸다.  

이와 관련 폭발이 일어나기 몇시간 전 문제의 창고문을 수리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항만국장은 "(폭발 당일) 오전 창고 문을 수리해달라는 보안기관의 요청을 받고 오후에 수리했다"면서도 "오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BBC는 레바논 국민은 이를 지켜보며 “정치인과 관료들이 이번 참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참사로 레바논의 경제난도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레바논은 치솟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 통화 가치 폭락 등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지난 3월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기도 했다.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75~90년 내전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란 평까지 나왔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폭발 참사로 집을 잃은 이재민이 30만 명 발생했고, 경제적 피해는 150억 달러(약 17조원)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레바논을 돕기 위한 도움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사고 이후 러시아의 긴급 구호물품을 실은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AP=연합뉴스]

레바논을 돕기 위한 도움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사고 이후 러시아의 긴급 구호물품을 실은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AP=연합뉴스]

시장 분석업체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레바논 전문가 나페즈 주크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레바논이 붕괴 직전의 상황에서 이번 일이 벌여졌다”며 “폭발사고는 (레바논의) 자유낙하를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진단했다.  

레바논은 이번 참사로 대규모 식량난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레바논은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하는데 베이루트항에 보관 중이던 다량의 곡물이 폭발로 사라졌다. 또 처참하게 파괴된 베이루트 항구가 앞으로 제기능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레바논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은 극에 달했다. 각국에서 베이루트에 구호물품을 보내는 가운데 레바논 국민들은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정부를 통한 기부를 피하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정부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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