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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우표에 베토벤이 왜?…"독재와 낭만의 기이한 동거"

중앙일보

입력

해외 직거래 사이트에 올라온 북한의 베토벤 기념 주화와 우표.

해외 직거래 사이트에 올라온 북한의 베토벤 기념 주화와 우표.

 “베토벤은 북한 정치가 ‘선택한 자’다.”
북한의 음악정치와 작곡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관계를 밝힌 논문이 나왔다. 배묘정 공연예술학 박사는 이달 논문 ‘독재와 낭만의 기이한 만남: 북한의 음악정치와 베토벤의 운명’에서 베토벤의 음악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북한의 정치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베토벤은 1994년 북한의 기념 우표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사망 180주기였던 2007년에도 베토벤 기념 우표가 발행됐다. 1999년엔 베토벤 기념 주화가 은화로 나왔다. 북한의 음악은 알려졌다시피 민족음악, 즉 전통에 뿌리를 둔 음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인민의 사상 감정과 정서에 맞는 음악'을 중시한다. 그런데도 베토벤이라는 서양 음악의 상징적 존재를 나라의 기념 주화와 우표에 활용한 것이다. 배 박사는 이에 대해 “북한이 사용한 베토벤 이미지는 고뇌하는 작곡가의 모습이다. 이 모습에서 서양 고전 음악이 보편적으로 표상하는 귀족적인 품위나 소위 부르주아적인 허위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데에 베토벤의 표상이 적절했다는 설명이다.

북한의 베토벤 차용은 시각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배 박사는 “2001년 스웨덴의 요랑 페르손 총리가 북한을 찾았을 때 북한 국가, EU 국가에 이어 베토벤 ‘환희의 송가’가 연주됐다”고 했다.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 쓰인 합창 부분이다.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는 세계를 그린 장대한 음악을 북한의 군악대가 연주한 것이다. 또한 논문에 따르면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유명한 주제는 북한 주민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20부작 첩보영화에도 쓰였다. 배 박사는 “베토벤 교향곡을 북한 주민들이 곡명도 모른 채 흥얼거렸을 정도라고 한다”고 전했다.

결정적인 것은 2013년 나온 김정은 찬양가 ‘우리는 당신 밖에 모른다’다. 김정은의 권력 승계를 공표해야했던 시기에 나온 이 노래는 베토벤의 ‘운명’ 모티브를 교묘하게 차용하고 있다. 특히 전주 부분에서 베토벤 ‘운명’의 유명한 주제 ‘다다다담’이 뚜렷하게  나온다. 당시 워싱턴포스트가 “수상할 정도로 비슷하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논문은 이 노래에 초점을 맞춘다. “노래의 목적은 인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 통합을 이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며 “북한의 선전부는 선전의 대상을 북한 인민 너머의 전 세계인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당신 밖에 모른다’의 가사는 영어로 번역돼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 배 박사는 “이러한 번역 작업은 북한 특수 선전부의 공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봤다. 베토벤의 음악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저항과 투쟁의 정신을 대내적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서구 문화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감을 보여주는 데 베토벤의 음악을 쓴다는 해석이다.

배묘정 박사는 한양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악학 전공 석사, 공연예술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의 연구교수다. 배 박사의 논문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베토벤의 위대한 유산』에 실렸다. 음악학자들의 모임인 음악미학연구회(대표 오희숙)이 펴낸 이 책에는 미학, 사회학, 개인적 관점에서의 베토벤 연구가 포함돼 있다. 책의 책임편집자인 오희숙 서울대 작곡과 교수는 "그간 베토벤에 대한 음악 양식적 연구가 많았다면, 이번 연구들은 미학과 사회학적 관점을 통해 베토벤에 접근했다. 베토벤의 음악은 음악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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