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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학 통계 부실…데이터 없어 서양인 기준 적용

중앙일보

입력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는 당시 건강검진을 담당한 의사에게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어 생명이 위험하다" 는 것이었다.

가슴 X선 촬영에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심장이 관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고 평생 건강하게 살았다.

지극히 정상적인 마라톤 선수의 큰 심장을 심근비대증과 같은 비정상이라고 판단한 의사의 오진이었다.

95년 경기도 고양시의 한 폐광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1백5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필자가 두개골 감식을 통한 신원 확인에 나섰지만 남녀 구분조차 하기 어려웠다. 한국인 남성.여성의 두개골 크기 및 형태와 관련한 자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상황은 여전하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하는 기준이 아직도 없다.

모두 서양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뿐이다. 한국인의 심장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는 사후 부검을 통해 크기와 무게를 직접 재봐야한다.

두개골도 머리 둘레나 눈과 눈 사이의 거리 등 신원 감식의 지표를 수천 사례 이상 축적해야 비로소 법의학적 활용가치가 있다.

문제는 돈 되는 일이 아니므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상' 을 알아야 '비정상' 을 가려낼 것이 아닌가.

질병도 마찬가지다. 몇가지 질환을 제외하고는 국내 환자 규모가 어느 정도며 어떤 사람이 많이 걸리는지 전혀 모른다.

치료 기술에선 이미 우리 의학계가 세계적 수준에 비춰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는 남이 만든 기술을 그대로 베껴온 것에 불과하다.

우리 손으로 새로운 치료 기술을 개발하려면 기초 연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멋쟁이 연구' 엔 돈이 몰려도 기초 연구에는 관심과 지원이 거의 없다.

"그까짓 심장의 크기는 알아서 무엇하느냐" 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심장에 대한 기초 지식없이 어떻게 한국인의 심장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서구 일변도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몸' 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윤성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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