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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대통령 인식 바뀌어야 우리가 북에 ‘갑’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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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저, 문재인입니다. 어제 인터뷰 잘 들었습니다”

과거 ‘전단살포는 주권침해’ 주장 #숙이면 더 밟는 북 민낯 직시해야 #원칙지켜 북 통제한 MB 참고하길

2015년 초. 출근길 지하철을 타려던 북한 전문가 김근식 경남대 교수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생면부지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당시)의 전화였다. 김근식은 전날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예고로 논란이 불거지자 방송에 출연해 "접경 지역 국민 안전이 위협받는 등 부작용이 있으니 전단 살포 자제를 요청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를 본 문 대표가 김 교수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김근식에 따르면 문 대표는 "그런데 전단 살포는 그(국민 안전) 외에도 더 문제가 있지 않으냐. (북한의) 주권을 침해하는 국제법 위반 아니냐”고 말했다. 김근식은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남북이 분단돼 경쟁하며 전단을 주고 받아왔는데 이걸 국제법으로 거는 건 문제다”라고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자 문재인은 "아무튼 저는 그렇게(국제법 위반이라) 생각하니 김 교수님도 생각 좀 해보세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필자에게 "결국 문 대표 말은 ‘북한이 주권국가이고 (김정은은) 선출된 지도자인데 다른 나라(한국)에서 비난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취지였다. 난 이를 듣고 당시 문 대표의 대북 인식은 북한이 주권국가, 정상국가란 것이라 판단했다”고 했다. "청와대 분위기가 정말 걱정된다. 대통령이 북한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어느 참모가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겠나. 김여정이 대북 전단 비난하니까 청와대 관계자부터 민주당 수뇌부까지 이구동성으로 ‘전단은 백해무익’이라 한다. 이렇게 단호하고 극단적인 표현이 어떻게 나왔겠나. 대통령 생각이 깔린 말 아니겠나”

북한이 ‘슈퍼 갑’으로 남측을 우롱하는 지금과 달리 8년 전엔 우리가 ‘갑’이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였던 2011~12년 북한은 남측에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걸했다. 천영우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북한 국방위원회가 내 집무실에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는 팩스를 수도 없이 보냈다. 스토킹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이 납작 엎드린 이유는 대북 전단과 확성기 방송 탓이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정부가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자 다급해진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 욕을 안 할 테니 전단 살포를 막아달라”고 읍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은 대통령 욕 맘껏 하는 사회다. 당신들도 욕하고 싶으면 실컷 해라”고 일축했다. 몸이 단 북한은 "그럼 뭐 해주면 되냐”고 매달렸다. 정부는 "북측이 천안함 폭침 책임을 인정한다면 민통선 내 심리전은 중단시킬 생각이 있다”고 치고 나갔다. 놀랍게도 북한이 이 제안을 받아 남북은 협상에 들어갔다. 청와대와 북한 국방위 관계자가 미국의 눈을 피해 베이징 등 3국에서 만나 여러 차례 ‘천안함 비밀 회담’을 열었다. 북한은 "책임 인정만은 못한다”면서도 "유감 표시는 얼마든 할 수 있다”고 유화 공세를 펼쳤다. 그러면서 "우리가 회담한 걸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으니 이런 코미디가 없다.

북측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 건 정부가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어 민간이 뿌리는 전단은 못 막는다. 이걸 핑계로 도발하면 단호히 응징하겠다”는 원칙을 철통처럼 지켰기 때문이다. 북한은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우리 군의 자주포 반격으로 6·25 이후 처음으로 본토(황해도)가 포격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노동신문에 "적의 공격으로 피 흘린 전사들을 위해 황해도 주민들이 대거 헌혈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을 만큼 당시 인민군의 피해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래식 도발로는 절대 남측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실감한 북한은 말로는 "역적패당 이명박 정부와는 절대 상종 않겠다”고 떠들면서도 전단 살포 중단 등 숙원을 풀기 위해 물밑으론 "만나달라”고 애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 ‘할 말은 하는’ 방식으로 나갔던 이명박 정부가 우월한 입장에서 북한을 다룰 수 있었던 비결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정상화할 길은 결국 문재인 대통령에게 달렸다. 북한은 상대가 약하게 나오면 가차없이 짓밟고, 강하게 나오면 꼬리를 내리는 나라다. 막연한 대북 동정심은 우리의 입지를 좁히고 북한의 행동만 더 나빠지게 만드는 최악의 수다. 북한이 잘못하면 따끔하게 지적하고, 도발 땐 몇배로 갚아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해야만 우리가 갑이 돼 대화를 주도할 길이 열린다.

무엇보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다. 이걸 피해 아무리 다른 길을 찾아봤자 종착점은 ‘제재 장벽’일 뿐임을 문 대통령은 명심해야 한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