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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하노이 망신에 화풀이"···흔들리는 '한반도 운전자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을 공개했다.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을 공개했다. [뉴스1]

북한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한데 이어 대화를 이어가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까지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서면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한반도 운전자론’도 크게 흔들리게 됐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17일 문 대통령의 6ㆍ15 공동선언 기념사를 비판하며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을 외부로 돌렸다”며 “과거 그토록 입에 자주 올리던 ‘운전자론’이 무색해지는 변명”이라고 비난했다.

이달들어 세 번째인 김여정의 담화를 통해 북한은 최근 남측에 대해 원망을 쏟아내게 된 배경을 좀 더 명확히 했다. “현 사태의 본질은 북남(남북)관계의 기초이며 출발점인 상호 존중과 신뢰를 남측이 작심하고 건드렸다는 것”이라며“우리가 신성시하는 것 가운데 제일 중심핵인 최고 존엄,우리 위원장 동지를 감히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표면상 대북전단 살포문제를 들긴 했지만, 결국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모독한 것이 현 상태를 초래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이에 대해 국내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을 믿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베팅했던 김 위원장이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남측에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못 한데 화풀이 성격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북한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불신감을 표출하면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남북, 북미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한반도 운전자론’도 현실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북관계-북미관계’라는 양대 축으로 움직였던 운전자론에서 한쪽 바퀴가 빠진 것이나 다름없어졌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문제의 주도적 해결”은 문 정부의 핵심적인 대북 정책 기조였다. 문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2017년 7월 독일 베를린 쾨르버 재단 연설과 8·15 광복절 경축사 등을 통해 이 같은 구상을 밝혔다. 이듬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 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며 한국의 중재자 역할에도 이목이 집중됐다.

첫 단추는 2018년 3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평양ㆍ워싱턴 방문이었다. 정 실장을 비롯한 특사단은 그해 3월 초 1박 2일 간 방북해 김 위원장과 김영철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면담한 뒤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정 실장은 같은 달 8일(현지시간)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했다”며 “김 위원장은 향후 어떤 핵 또는 미사일 실험도 자제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한미 양국의 정례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지속돼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해 5월 말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측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모욕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안 할 수도 있다”며 크게 화를 내자, 다급해진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SOS’를 요청해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 간 깜짝 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가운데)이 2018년 3월 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후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5월까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가운데)이 2018년 3월 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후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5월까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급속도로 위축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 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부터였다. 막상 비핵화 협상의 뚜껑을 열어보니, 북ㆍ미가 생각하는 비핵화의 그림과 해법이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전달자를 자처했던 한국이 “제대로 역할을 한 게 맞느냐”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됐다. 한국 정부는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영변 핵시설의 폐기와 부분적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미국은 영변을 넘어 비핵화의 최종 상태(end state) 정의와 로드맵 합의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북미 정상 '하노이 작별' 장면. [연합뉴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북미 정상 '하노이 작별' 장면. [연합뉴스]

하노이 회담 마지막 날(28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취지로 말하며 협상을 결렬시키고 회담장을 떠버렸다. 예상치 못한 미국의 반응에 다급해진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급히 뛰어나와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 등 미 정부 관계자들에게 “영변을 전부 내놓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영변 시설’의 범위와 정의조차 북한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 위원장은 한국을 믿고 베팅했다가 하노이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싸늘하게 돌아선 건 이때부터였다. 그해 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명의 담화를 통해 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비판하면서,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하늘을 향해 웃는다)할 노릇”이라며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했다. 최근 김여정의 담화와 연락사무소 폭파 등은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단계라는 지적이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2019년 3월 1일 새벽(현지시간) 제2차 북미정상회담 북측 대표단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전날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된 것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2019년 3월 1일 새벽(현지시간) 제2차 북미정상회담 북측 대표단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전날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된 것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결국 김 위원장이 던졌던 어젠다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만감을 한국에게 표현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총선 이후 한반도 문제를 주도할 동력을 확보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국면 변화에 외교·안보 라인의 쇄신과 위기 관리 모드로의 전환이 불가피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17일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유정ㆍ백희연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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